‘한 대리는 이번 프로젝트 마치고 나면 날개를 달겠어. 축하해”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한 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전투적인 프로젝트가 끝나자 긴장감이 풀려서였을까?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혀 생각지 못한 번 아웃[1]이 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기대주로 더 큰 프로젝트를 맡아 주길 바랐지만,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열정을 낼 수가 없었다. 주어진 일만 겨우겨우 하기에도 몸과 마음이 쉽게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한 대리 요즘 예전 같지가 않네. 무슨 일 있어?”
그때는 긴장이 풀어져서 잠시 그런 것뿐, 컨디션이 회복되면 괜찮아지려니 했다. 그즈음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로 돌아왔을 때, 팀원들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대리 휴가 가고, 부장님 주재로 개발팀 전체 회의가 있었어요. 앞으로 디자인팀 리더는 김종수 대리라고 발표하시더라고요. 다들 좀 의아했지만 설마 한대리도 알고 있겠지 했어요. 근데 왜 당사자가 자리에 없을 때 그런 발표를 하는지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 순간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하필 오늘 이런 얘기를 듣다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김종수 대리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 직원으로 운영팀을 맡고 있어서 개발팀을 맡은 나와는 분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늘 어려운 일은 피하는 데다 쉬운 일만 하는 이미지여서 팀 내에서 밉상으로 불렸는데, 그 사람한테 리더를 넘겨준다고? 그것도 내가 없을 때 기습적으로 발표를 해?
그런데 더 심각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이런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법도 한데 얼굴을 마주하거나 얘기를 하려고 하면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면서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왜 말을 안 듣지? 내가 너무 충격을 받았나? 아니면 결혼 준비와 업무가 겹쳐 요즘 너무 피로가 쌓여서 그럴지도 몰라. 곧 나아질 거야. 괜찮아지겠지… 마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얘기해보자.’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조용히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억울함과 분노가 성난 파도처럼 일렁였지만,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것처럼 마음이 제멋대로 두 방망이질 쳤고, 아주 작은 일도 점점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IMF가 터지던 위기의 그때, 누가 보면 무모하기도 했던 나의 첫 번째 도전이 떠올랐다. 한창 자기 계발이 유행이었던 2000년대 초, 인터넷 동호회에서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는 독서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책이 1997년 출간되어 경제 분야 스테디셀러가 된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였다.
이 책은 나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생각의 방향을 전환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일했지만 뜻하지 않은 번 아웃 뒤에 찾아온 공황장애는 그 이후에도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건강상에 문제가 오자, 당장 일을 못 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새삼 직시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와 같은 봉급 노동자(Employee)들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변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일하지 않아도 돈이 나오는 파이프라인을 꾸준히 구축해야 하는 중요성을 알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내가 속해 있는 인터넷 사업개발팀이 스핀아웃[2]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팀 분위기도 뒤숭숭해졌다.
같이 갈 것인가? 독립할 것인가?
솔직히 더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과연 독립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었다. 독립이란 지금까지처럼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이고, 지금 벌고 있는 수입을 유지하기 힘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배우자의 의견도 중요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을 때 독립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만류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십 분일 리가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독립의 기회를 잡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결혼했으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나가서 독립 기반을 잡아 놔야겠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다행히 남편도 내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잠시였지만 모든 것이 분홍빛이었고, 나라를 되찾은 것처럼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설렜다.
이 길이 아닌 가벼?
지식사회에서는 조직에 있던, 밖에 있던 끊임없이 자기의 역량을 확인하고 계속 교육을 통해 그 지식을 최신의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조직 안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는 그것을 쉽게 망각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회사 안에서 내가 한 것은 준비가 아니라 문제 인식 수준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막상 나와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조급함이 느껴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때로는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러려고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1]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로 무기력증, 자기혐오 등에 빠지는 증후군
[2]
기업의 여러 부서 가운데 어떤 사업 분야에 특화된 부서를 독립된 사업체로 분리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