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알아주는 명함을 갖고 있고, 부러워하는 편안함도 있었다. 날밤을 새워가며 프로젝트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기도 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느끼는 보람은 과정에서 겪어내야 하는 힘겨운 일들을 말끔히 씻어 냈다. 몰랐던 적성도 발견했다. 혼자서 일하는 것보다 함께 토론하며 아이디어를 내고 서로의 장점을 살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동감 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직원들에게 항상 격려와 동기부여를 해 주고, 늘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 때문에 인기가 많던 강 부장이 사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게는 사내에서 유일하게 닮고 싶은 롤 모델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입사 초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강 부장은 입사 동기 중에서도 일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패기와 열정이 넘치던 20대 청년은 회사가 곧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 일 때문에 주변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어 비난을 받아도 주말도 없이 소처럼 일하며 회사를 키워낸 주역이었다.
“내가 입사하던 1980년대만 해도 회사가 전문가(Specialist)보다 두루두루 잘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져서 남들과 차별되는 전문가(Specialist)가 되라고 주문하더군요. 회사가 원하는 적절한 인물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나의 이삼십 대는 어느새 처음의 열정을 잊고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더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떠나지만, 여러분들은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역량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일하길 바랍니다.”
“먼저 간다.”
마치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처럼 강 부장은 고개 숙인 부하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지막 악수를 하며 떠났다. 자기 자신으로 일한다는 것,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몇 명의 부장들이 계속 자리를 떠났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난 뒤부터 내게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회사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왜 잊고 있었을까?
2002년이 한 일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해라면, 나에겐 SK 오케이 캐시백 사이트 리뉴얼 디자인 PM [1]을 하면서 후회 없이 열정을 쏟아부었던 기억이 생생한 해이다. 내가 맡은 역할은 내부 디자인팀과 웹 에이전시 아웃 소싱 팀을 조율하고 다른 파트(프로그램팀과 기획팀)와 협력하여 최고의 디자인 결과물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모든 구성원이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부어 진행했던 프로젝트인 만큼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1]
Project mana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