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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정 Oct 24. 2021

스펙 한 줄 안 되는 엄마 데뷔

 2005년 9월 15일 오전 11시 14분 천지가 개벽하고 나는 새로 태어났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가 된 거다.

  깊은 잠에서 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밀려오는 통증과 회복실의 소름 돋는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집안 여자 중에는 순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마지막 한 달은 출산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 여유 있게 남겨놓았건만, 그날 새벽 느닷없이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배꼽 아래 절개의 흔적을 알리는 커다란 테이프와 제왕절개 산모에게만 수여되는 끔찍한 소변줄은 참기 힘든 후배 앓이와 함께 엄마가 되는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리는 서막 같았다.
 
 “아이고 말도 마요. 나는 첫째 때 갈치조림하려고 도마 위에 갈치 올려놓고 비늘 벗기다 끌려왔다니까요.”
 “어머 정말요? 저는 많이 움직여야 애를 쉽게 낳는다고 해서 손걸레로 바닥 닦다 엄마 됐어요. 호호호”
  산후조리원에 모인 산모들이 어떻게 엄마가 됐는지 에피소드를 듣다 보면 하나같이 어이없고 기가 막힌 사연들로 가득하다. 

 나 역시 한 달 먼저 예상에 없던 출산으로 당황스러운 터였지만, 아무리 예정보다 먼저 엄마가 됐기로서니 모든 상황이 이렇게 낯설고 힘들 수 있을까?

 한번 누우면 업어가도 모르게 자던 나도 신기할 만큼 아이의 작은 뒤척임에 바로 반응하는 엄마로 조금씩 적응해 갔다. 하지만 한밤중에도 2시간에 한 번씩 젖을 물리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날이 계속 이어지니 몸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에너지는 바닥이 나고 머릿속에는 미처 마무리 못 한 일들과 지금까지 고민하며 준비하던 계획들을 하루아침에 사망신고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급함과 불안이 밀려왔다.     

“잠깐은 몰라도 애는 못 키워 준다.” 
 하긴 아이를 낳기 전, 비즈니스 창업에 대한 로망으로 용감무쌍하게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일 년여 간이나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었으니 양가에 무조건 들이댈 명분도 없었다. 
 나의 독박 육아는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되었다. 

 독박 육아는 생각한 것보다 더 고되고 힘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들도 산후 우울을 겪는다고 한다. 남편은 외벌이로 책임감이 더해진 데다 피곤함에 찌든 늦은 귀가 후에도 육아를 돕느라 계속 지쳐만 갔다. 
  아이가 태어난 후 더 행복해져야 할 우리 집은 피곤에 쩐 두 사람의 날 선 예민함으로 긴장감이 돌고 싸움도 늘어갔다. 감정이 바닥을 치면 그나마 남아있던 힘도 사라져 손이 많이 가는 아기와 보내는 하루가 암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로는 내 안에 아직 덜 큰 어린아이가 자기도 보살펴 달라고 아우성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긴 터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독박 육아,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과 단절은 나를 점점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쾅!”

 아파트 현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면 나와 아이는 철저한 고립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큰아이 육아는 내 안에 소음과 함께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개봉되었다. 모 광고에도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라는 카피가 사회에 화두로 던져지며 눌러왔던 엄마들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모성애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건 줄 만 알았는데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스스로 내린 자괴감의 무게는 나를 충분히 짓누를 만큼 무거웠다. 조바심과 두려움이 마음을 억누를 때는 아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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