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신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아기와 보내는 일상은 일부러 꾸밀 필요도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쾌한 척, 쿨한 척, 잘하는 척 이른바 ‘척’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동안은 직장생활이나 사회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대로 해야만 했었다. 그러느라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의 소리를 진지하게 들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십여 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하고 서른 중반의 나이에 육아 덕분에 하던 일에 느닷없이 쉼표를 찍어야 하는 단절의 상황과 마주하니 비로소 마음이 얘기하는 솔직한 생각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란 듯이 빨리 결과를 보여주고 싶은 조바심에 시도했던 일들은 오히려 좌절과 우울감을 가져다주었다.
마음은 지금이라도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보라고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를 보고 있노라면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맞아. 지금 네가 꿈을 꾸는 건 욕심이야, 아직 말도 못 하는 아기를 두고 네 욕심만 차리는 건 나쁜 거야. 봐봐 다들 지금은 엄마로 살라고 하잖아.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니? 넌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러니 슬퍼하지 마. 이제 너를 위한 시간은 끝났어. 넌 이제 누군가를 위해 그동안 네가 받았던 것들을 내어 줄 시간이 된 거야. 할 수 없어. 하면 안 돼.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혼잣말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마음은 자꾸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하는 소리를 거부할수록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만 갔다.
독박 육아로 외부와 단절되는 경험을 하고 보니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결이 얼마나 소중한지 간절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가끔 찾아오는 택배기사님도 반가워서 몇 마디 더 붙이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바쁠 때는 몰랐던 것, 넘칠 때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의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왔다.
“자아의 신화, 그것은 자네가 항상 이루기를 소망해오던 바로 그것일세.
파울로 코엘료 장편소설 연금술사 중에서 살렘의 왕이 양치기 산티아고에게 한 말이다.
어쩌면 그때가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그간 나를 스쳐 간 의미 없는 여러 번의 신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작은 용기야.
돈 안 들고, 실패해도 티 안 나는 그런 일을 하면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을 거야. '
온라인은 웹디자이너였던 내게 익숙한 환경이니 여기다 집을 지어보자.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미치자 입학을 기다리는 신입생처럼 가슴이 다시 뜨거워 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시 네이버에 모바일 기반 커뮤니티가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첫 커뮤니티는 그곳 밴드(band)로 결정했다.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색을 입히고 이름을 정하고 앞으로 사람들에게 불릴 닉네임은 커뮤니티 이름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책마라고 정했다.
지금 마미킹의 디딤돌이 되어준 5,000명 엄마 커뮤니티 ‘책아이책엄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