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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choice Jun 19. 2023

설악산 밑자락 지구인 에스프레소 바

느리게 살아가는 연습

강원도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났다. 몸은 여기로 옮겨왔지만 무거운 마음은 여전히 서울에 있었다. 눈을 떴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쉬러 온 거니까 괜찮아.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나는 마음이 좋지 않을 때마다 바다가 아닌 설악산 밑자락으로 향했다. 바다 앞의 바글바글한 사람들 떼를 보고 있으면 왠지 더욱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바다의 짠내가 아니라 한적한 풀 냄새를 좀 맡고 싶어졌다. 설악산으로 가려면 속초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7번이나 7-1번 버스를 타면 된다. 뜨거운 햇볕 아래를 걸어 버스정류장 앞에 가 섰지만 강원도에서 버스를 기다린다는 건 기약 없는 기다림에 가깝다. 9분 후에 도착한다는 버스 전광판을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30분 이내에 갈아타면 버스 요금이 무료! 라는 좋은 환승 제도가 있지만, 내가 탈 환승 버스는 30분이 지나서야 내 앞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빠름’이라는 전제는 여기서부터 무너진다. 강원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느리게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설악산 상도문 돌담마을 풍경

버스를 타고 설악산 입구로 들어가게 되면 순서대로 하도문, 중도문, 상도문이라는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 대신 나무와 풀, 꽃, 그리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동물들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상도문 돌담마을로 향했다. 왜 돌담마을인가 했더니 마을 곳곳에 자리한 돌담 벽에는 글도 있고 강아지도 있고 참새도 있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 그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아침의 불안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지구인 에스프레소 바

돌담을 따라가다 보니 눈에 띄는 하얀색 집이 나타났다. 상도문 돌담마을의 문화공간, ‘지구인 에스프레소 바’란다. 어쩐지 특이한 이름이네. 그런데 에스프레소만 파는 곳인가? 나는 커피를 좋아했지만 에스프레소는 내 호감을 사기에 너무 작고 썼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조그만 잔을 보고 있으면 왠지 한 입에 다 털어 넣어야 할 것 같았다. 그걸 마시게 되면 빈 잔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게 껄끄러워 카페에서도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계산대 앞에 서서 괜히 긴장된 마음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고 입을 뗀 순간.


저희는 에스프레소가 제일 맛있어요.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이걸 한 번 마셔보시는 걸 권해요.

생각보다 별로 쓰지 않아서 괜찮을 거예요.


아… 네. 여기서는 지구인 에스프레소가 시그니처 메뉴인건가요?


네 맞아요.


음… 그러면 지구인으로 한 잔 주세요.


지구인 에스프레소 바 내부 풍경

에스프레소 말고 무엇을 마셔야 할지 고민했던 순간들이 약간 바보 같아졌다.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오늘은 어차피 에스프레소를 마실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곧이어 원두 가는 소리와 함께 에스프레소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나는 바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과 무선 마우스를 꺼내 오늘의 작업장을 세팅했다. 그러다가 노트북 충전기를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노트북 배터리를 확인해보니 고작 47퍼센트가 남아있었다. 아, 한 시간이 넘게 걸려서 왔는데…. 불안한 마음이 증폭될 무렵 사장님이 완성된 에스프레소를 내 앞에 놓아주셨다.


식기 전에 꼭 첫 맛을 보셔야 해요.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고? 아, 그런데 노트북 충전기가 없으면 오늘 작업은 어떻게 하지? 다시 집에 가야하나? 나는 노트북과 에스프레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일단 당장 식을 위기에 놓여있는 에스프레소부터 마시기로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 온 지난 두 달 간의 내 일상 같았다. 노트북을 덮고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장님은 느릿한 손동작으로 컵을 닦고 있었고 열린 문틈으로는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살짝 휘날렸다. 거기에서 조급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면 왠지 빨리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노트북 배터리가 금방 꺼질 것 같다고, 집에 가는 데 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나는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다 마신 후 꼭 필요한 작업들을 마쳤다. 다행히 노트북 배터리는 떨어지지 않았고, 오늘의 계획이 어그러졌지만 크게 나빠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생각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야만 먼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나도 조금 느리게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싶어졌다. 현재를 앞서간 걱정과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게 마음의 속도를 느리게 살아가는 연습.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괜찮은 일도 생기겠지. 문득 발밑을 보니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래, 때론 어떤 무지개는 발밑에 뜨기도 하니까.


때론 어떤 무지개는 발밑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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