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토론토에서 뉴욕까지
버스로 10시간 남짓.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다.
그래서 나도 버스를 타고
뉴욕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제 내가 아무렇지 않게 걸었던 길에서
오늘 총기사고가 나는 곳이 뉴욕 아닌가.
한참 고민하다가 배낭여행이 아닌
반패키지 여행상품을 선택했다.
주요 여행지는 패키지 상품처럼 함께 다니고,
식사도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먹을 수 있고
자유시간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꽤 괜찮은 결정이었다.
이 여행에서
첫 번째 초상화의 주인공이었던
Mari를 만났다.
Mari는 노르웨이에서 온 17세의 소녀였다.
우리는 뉴욕 여행에서 돌아와
토론토에서도 만남을 이어갔다.
그녀와의 첫 만남과
뉴욕 여행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뉴욕의 마지막 날 저녁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Mari는 'Sex and the city'의
촬영지였던 거리와 상점들을 가고 싶어 했다.
캐리의 집이 있던 그리니치 빌리지,
샬롯의 아파트가 있던 어퍼 이스트 사이드,
컵케잌 순례자들의 성지와도 같은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프러포즈를 하면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브루클린 다리 등등.
나도 'Sex and the city'를 재미있게 봤지만
오늘은 좀 더 특별한 걸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움직이기로 했다.
Mari는 다른 일행을 따라갔다.
특별한 걸 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무 계획이 없었다.
관심 있는 몇 개의 장소를 제외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무계획이 계획인
즉흥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현지의 일상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요즘 나의 여행패턴이다.
명소는 놓칠지 몰라도
다양한 시선에서 그곳의 일상을 바라보고
예상외의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는
우연한 경험의 기회들이 늘어난다.
그때 문득 가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TKTS 부스에 가면 브로드웨이 뮤지컬
티켓을 절반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요."
빨간색의 TKTS 부스는
당일 팔리지 않은 공연의 표를
50% 이상 저렴하게 판매하는 매표소였다.
티켓이 저렴한 만큼, 인기가 많은 공연은
일찍 매진되기 일쑤고 좌석을 지정할 수 없다.
'뉴욕에 온 이상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안 볼 수 없지.'
나는 TKTS 부스가 있는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예약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공연이 있는지
알고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공연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매표소 앞에서 내 순서가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줄이 꽤 길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입장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1분 1초가 아쉬웠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성인 1명이요.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공연으로
아무거나 주세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매표원은 매표소의 문을
야멸차게 닫아버렸다.
탄식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매표소 문을 두드리며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30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대부분이 관광객이기 때문에 공연이 시작되면
표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뮤지컬 관람 외에 별다른 계획이 없던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나섰다.
영화에서 보던 뉴욕 택시,
Yellow Cab이다.
택시기사는 흑인이었다.
어디 갈 거냐고 물어보는 택시기사에게
난 우물쭈물 대다가 본격 상담을 시작했다.
이건 내가 국내 여행을 할 때마다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다.
잘 모르는 곳에 왔는데 어딜 가야 할지 모를 때,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와 상의하며
정보도 얻고 목적지를 정한다.
"Soho나 Chelsea에 가면 어떨까요?"
"지금 가면 문 다 닫았을걸?"
"아... 그럼 지금 문 연 곳은 없을까요?"
"지금은 시간이 애매해.
아! Meat Packing은 어때?
걷는 걸 좋아한다면 밤에 High Line을
걷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오~ 좋아요."
처음 타본 뉴욕 택시였기 때문에 떨렸지만
무덤덤한 택시기사 아저씨 덕분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Meat Packing인가요?"
"맞아. 저기 위에 육교 같은 거 보이지?
저게 High Line이야.
출입구가 여러 군데 있으니까
편한 데로 올라가면 돼."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Meat Packing에 첫발을 내디뎠다.
The Standard Hotel 앞.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는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KAWS라는 작가의
<Companion>이라는 작품이었다.
잠실 석촌호수에 설치됐던 <러버덕>처럼
전 세계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KAWS는 미국 뉴저지 출신의 유명 팝 아티스트로,
1990년대 초 빌보드, 공중전화 등의 광고판에
작업한 그래피티로 유명해졌다.
‘Companion’이라는
이름의 이 캐릭터가 그의 대표작이다.
다양한 컨텐츠로 변화하는 이 캐릭터는
팝아트에서 아트토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데
기여했고 여러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여기서 널 만날 줄이야...'
‘Companion’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본격적으로 미트패킹 탐험에 나섰다.
Meat Packing District는
1930년대 육류 가공업체가 밀집돼 있던 곳이다.
도축장과 정육업체들이 즐비한
서울의 마장동과 같은 곳이었다.
이 곳의 역사는 150여 년 전
Farmer's Market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도시 발달과 함께 시장상인들이 이동하면서
1930년대 육류가공업체들이 밀집한 공간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250여 개의 업체가 있었다.
이곳에서 도축 및 가공된 육류는
철도를 따라 도시 곳곳의
마트와 레스토랑 등에 공급되었다.
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냉장 및 냉동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거리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가정과 식당에 냉장고가 보급됨과 동시에
더 이상 이곳에서 생고기를
구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1960년대
업체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거리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장동에 가면 골목 곳곳에서 누리누리한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느낌인데,
도축, 가공이 주로 이뤄졌던 이곳의
환경과 인식 또한 좋았을 리 없다.
하나 둘, 빈 건물이 생기면서
급격하게 동네의 슬럼화가 진행되었고
지역은 침체되기 시작했다.
퇴폐적인 바와 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도시 뒷골목의 비밀 같은 유흥가가 조성되면서
할렘과 같은 우범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그래피티와 뒷골목의 음산한 분위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
1990년대,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눈 밖에 난 이 곳은
뉴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저렴한 임대료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소호와 웨스트 빌리지에서 쫓겨난
가난한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도축공장을 개조해
갤러리와 샵, 클럽 등을 열었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2000년대 재개발 붐이 불어
잘 나가는 클럽과 바, 명품 프래그십 스토어와
고급 부티크 등이 들어서면서
뉴욕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골목 구석구석에서
옛 미트패킹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대여섯 개의 정육업체가 남아있다.
뉴욕 시는 Meat Packing District의
역사적 가치를 중요한 지역 유산으로 평가하고
2003년 역사 보존 지구로 지정하였다.
한편 2004년 <뉴욕타임스>는 이곳을
뉴욕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지역'으로 선정했다.
오늘날 Meat Packing District는
뉴욕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 되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건축가,
예술가들의 시그너처 샵이 있고
애플, 구글, 삼성 등 세계적인 IT 기업들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작년 4월 뉴욕의 현대미술관인
Whiteny Museum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이러한 변화에 정점을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Sex and the city'에서 PR 매니저로 나왔던
사만다가 자신의 동네에서 쫓겨나면서
새로 이사 간 아파트가
Meat Packing District에 있었다.
빅과 캐리가 웨딩 리허설을 했던
Buddakan 또한 이곳에 있었다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 역시 'Sex and the city'의 촬영지를
찾아온 셈이 되었다.
사만다가 이사한 집의 월세가
7,000달러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초기 미트패킹의 문화를 이끌었던
가난한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최신 유행과 트렌드를 선도하며
빠르게 고공 질주하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젠트리피케이션의 그림자,
그 너머가 궁금해진다.
해가 지기 시작한
어스름한 초저녁,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골목 투어를 마치고
샵을 구경하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택시기사의 말과는 달리
대부분의 샵이 문을 닫았다.
OMG!!!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다음 편에 계속...
* Cover Image : @Ludovic Bertron https://flic.kr/p/6Dg7K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