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하이라인의 출발지점이었던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정신없이 파워 워킹을 해서 그런지
배가 무척 고팠다.
'뉴욕에 왔으니
스테이크를 안 먹어볼 수 없지~'
특별히 맛집을 알아보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리를 돌아보다 눈에 띄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웨이트리스가 자리로 안내했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요리사로 나왔던
모니카와 참 많이 닮은 여성이었다.
"스테이크를 먹을 건데,
추천 좀 해주세요."
"네~알겠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친절했다.
메뉴판을 펼쳐놓고
여러 메뉴를 추천하며
파스타 면을 직접 뽑는데,
어떤지 한번 보겠냐고
나를 주방에 데려가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미디엄 레어로 구운 티본스테이크와
그릴에 구운 아스파라거스.
그녀가 추천해준 메뉴를 주문하고,
와인 한 잔을 시켰다.
역시 알아보고 온 곳이 아니라서,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맛있냐고, 괜찮냐고...
뉴욕에 오니 어떻냐고...
계속 말을 건다.
문득 머리가 복잡해졌다.
'팁으로 얼마를 줘야 하지...'
그녀가 계산서를 가져왔다.
TIP
recommanded : $18
더 주고 싶은데,
18달러라고 적어왔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결국 18달러를 팁으로 줬다.
그런데 팁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친절하던 태도는 안드로메다로 보냈는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중에 알고 보니
캐나다보다 미국이 팁에 후한 편이었다.
팁을 더 줬어야 했나?
중학교 때
"Keep the change."
라는 표현을 배우면서
팁은 잔돈이 남았을 때 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잔돈을 줄 때가 있고
팁을 별도로 챙겨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팁으로 보통 지불 금액의 10%를 주는데,
서비스가 마음에 들면
20%든 30%든 주고 싶은 만큼
더 주면 된다.
특히 레스토랑의 웨이터나 웨이트리스들은
최소한의 기본급만 받고
거의 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잘 챙겨주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팁 문화가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까울 때도 있었지만,
사람이 일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고
서비스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관점을 바꾸고 나니 팁을 주는 것이 편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클럽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 복장으로 클럽은 무슨...'
나는 질끈 묶은 머리에
후드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한 손 가득한 쇼핑백과 배낭,
운동화는 또 어쩌란 말이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바를 찾아 나섰다.
처음에 거대한 어깨의 흑인 보디가드가
지키고 있는 바에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요상했다.
19세기 유럽풍의 인테리어에
마치 청소년처럼 앳돼 보이는
소년과 소녀 같은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상하다. 신분증 검사받고 들어온 건데...'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몇몇은 수다를 떨고 몇몇은 숨바꼭질 같은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주문을 받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카운터를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고,
10분 정도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결국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이곳은 또 의상을 제대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은 드레스를,
남자들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다.
입장 제한을 하지 않았던 것 보면
정장이 필수인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커다란 지도를 들고
배낭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든 모습을
보아하니 관광객인 것 같은데,
동양인 여자가 밤늦은 시간에
바에서 혼자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
뭔가 이상하게 생각됐나 보다.
옆 자리에 있는 커플이
나를 바라보며 숙덕이기 시작했다.
앞자리의 커플 또한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다 들리거등요?'
'다 알아듣는다구요...'
칵테일 맛을 음미하며, 카운터를 바라보니
바텐더가 여직원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다른 여직원이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아까 걔네들이 팁도 안 내고 튀었어."
"뭐야?"
"자리에 칵테일 값만 두고 가버렸어."
"당장 잡아!"
바텐더와 여직원이 그 손님을 잡기 위해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나는 조용히 나머지 칵테일을 들이켠 후,
자리에 칵테일 값과 팁을 올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밤 12시가 넘었다.
딱히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지도 않고,
밤길을 혼자 다니기도 무서워서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시간도 늦었지만
바가지를 안 쓰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택시를 세우고
호텔 주소가 적힌 명함을 보여주며
택시기사와 딜을 시작했다.
"이 호텔에 갈 건데, 얼마예요?"
"밤이라 할증이 붙어요.
정가대로 받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서 얼마인데요?"
"120달러입니다."
택시기사는 야간 할증이 반영된
단가표를 보여주었다.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택시는 뉴욕의 밤을
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는 콜롬비아에서 온 이민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하얀 피부에 짙은 흑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듬직한 인상의 사나이였다.
"어디서 왔어요?"
"아~ 캐나다에서 왔어요."
"캐나다에서 살아요?"
"아뇨. 한국에서 캐나다에 여행 왔다가 온 거예요."
"아~ 한국에서 왔군요. 태권도 알아요."
슉슉~~
택시기사는 주먹을 쥐고
허공에 휘두르며 '태권'을 외쳤다.
"진짜요? 하하. 저는 콜롬비아 커피 알아요."
"하하. 다들 커피 이야기만 하죠.
콜롬비아 커피가 맛있긴 해요."
한국에 대한 이야기,
이민 생활에 대한 이야기,
뉴욕에 대한 이야기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했다.
계산을 하고 내리려는데
택시기사가 말을 걸었다.
"저기..."
"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음...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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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뉴욕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