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코로나19 역학조사관을 내가 일하게 된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었다. "너네 동네 보건소에서 코로나19 역학조사관을 구한대. 해볼래?"라는 말에 밑져야 본전이지 싶어 신청했는데 덜컥 붙었다. 한 달에 2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최저 시급이었지만 나는 마냥 좋았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나에게는 잘 없었으니까.
일은 이렇다. 아침에 오면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의 엑셀 스프레드시트가 사람마다 배분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하고 상태가 위중한(이 기준이 참으로 난해하다) 사람은 병원으로 보내고 아니면 자택에서 쉬는 것을 권유하는 일이었다. 하루마다 정해진 양은 들쭉날쭉했는데 심할 때는 150건이 넘어갈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저희는 보건소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여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 아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증상이 어떻습니까?" 사무적으로 전화를 어깨에 걸쳐 받으면서 증상을 타자 치고 있는데, 엄마가 "우리 아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예요"라는 말을 했다. 내 손이 우뚝 멈췄다. 나는 당장에 핫라인에 설명을 했다. 당연히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핫라인에서는 매뉴얼에 없습니다,라는 말로 단칼에 끊어버렸다. 상태가 위중한 매뉴얼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뉴얼이 그렇게 좋으면 월급도 매뉴얼로 받지 그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그 환자는 핫라인에 연결되지 못했다. 그날이 가장 일을 하면서 우울한 날이었다.
때로는 또라이가 걸릴 때도 있었다. "XXX 이 빨갱이 새끼들이"로 시작되는 육두문자는 어찌나 그 방법이 똑같은지 패턴을 강약중강약 외워버릴 뻔했다. 어떻게 보건소에서 우리들의 개인정보를 아느냐, 이게 다 당시 대통령 때문이나 등등의 폭언을 했다. 그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나는 대통령이 아니었고 일개 아르바이트 생일뿐인데요,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은 화를 더 냈다.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욕을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하면 자못 죄송했는지 내가 선생님께 그런 게 아니고 하는 변명들을 했다. 그러면 나는 변명은 됐고 서울대보다 가기 힘들다는 침대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 고단한 날들엔 퇴근하면서 가족들과 같이 먹을 통닭을 사서 집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영문도 모르는 가족들은 내가 통닭을 사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쁜 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하면 사람들의 컬러링을 들을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곡이 들려왔다. 나훈아 선생님의 사내란 곡이었다. 너무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의 업무 사이에 나 혼자만 달콤한 사탕을 몰래 까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화가 오랫동안 연결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디세요. 내가 물으면 밭이라고 했다. 밭이요? 제가 아는 밭 말입니까. 내 말에 그럼 어디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코로나19는 어떻고요. 그러니까 어르신이 코로나19보다 밭에서 모종 못 심으면 그거 다 니 탓이다 소리를 지르셨다. 그렇군요. 코로나19보다 밭이 중요하군요. 나는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종종 외국인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내가 전담했다. 대충 영어로 질문사항 몇 개를 체크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박수를 쳐 줬다. 그럴 때는 자아효능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일을 하면서 뭐든지 쓸모가 있구나 생각할 수 있어서 그게 좋았다.
보건소 앞에는 맛집 카페가 하나 있었다. 나는 일하는 직원들과 거기서 커피를 종종 시켜 먹고 빵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일하기 전에는 왜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 돈 버는 장소에서 주전부리를 먹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런 것들이 고단한 일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간식보다는 수혈에 가까운.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내가 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고 그들과 친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주전부리보다 더 좋았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일이 연장되었다. 몇몇 직원들에게만 내려진 특혜였다. 그렇지만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일은 내 정신건강에 아주 좋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는 9 to 6 생활을 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내 기분장애 리듬이 잡혔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은 내가 사람들과 어울려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내가 일이 연장된 것은 나의 사회성이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분이 좋았다. 나도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증명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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