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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Dec 11. 2024

그날의 일기

2024년 최악의 날들에 대한 기록

보통 공부를 하면 핸드폰이고 TV고 틀어놓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공부를 마치고 자기 전 카카오톡을 열어봤다. 친구 K에게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계엄령이래.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진짜야. TV 보고 있어 봐. 나는 얼른 TV를 켰다. 국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진을 치고 국회의 창문을 깨고 있었다. 시민들은 스크럼을 짜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새벽 모 정치인이 피습을 염려하여 핸드폰으로 실시간 담장을 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이게 무슨 2024년입니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지나갔다. 다른 친구 몇몇은 지금 당장 국회로 가겠다고 말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결국 그날 3시쯤 잠들고 다다음 날 토요일이 되었다. 친구와 공부를 하자던 약속을 취소하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잠들지 못해 커피를 잔뜩 마셨다. 나는 아침 8시 국회의사당 스타벅스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 첫 번째로 앉아 국회의사당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산발적인 퇴진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내 생에 들을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낡은 종이 안에 있던 문구가 생생한 현실을 입고 튀어나왔다. 다른 뉴스로는 80년대 광주항쟁에 대한 소설을 쓴 한강의 노벨평화상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였다. 나는 이 두 개의 현실이 가져다주는 지나친 괴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카페에 앉아있던 중 속보가 튀어나왔다. 10시에 윤이 대국민 담화를 한다고 했다. 나는 더 나쁜 소설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무서웠다. 나는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이 현실이 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평화는 얄팍했으며 불안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 있었고, 윤은 9수를 했던 양반이니 어떤 나쁜 일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짐을 싸서 걸어서 최대한 국회의사당 반대편으로 나갔다. 여의도 공원에 다다르자 거기에는 경찰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포위되어 잡히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자꾸 흝어보았다. 9시 55분. 5분 사이에 이 포위망을 벗어나 여의도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IFC몰에 평상시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계속 들으면서 10시 대국민담화를 들었다.


대국민담화는 정확히 2분 남짓했다. 컵라면보다 빨리 식었다. 심지어 나는 그 모든 말들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당이라니. 국회라고 말하는 쪽이 맞지 않은가. 진영논리 이전의 문제였다. 탄핵을 시키겠다는 모 정치인의 말과 횡보가 술 취한 사람의 걸음처럼 갈팡질팡했다. 나는 권력에 대한 그의 야욕보다, 그 이전에 그 사람의 존엄이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틀 전에 자신을 체포하라고 했던 양반의 말을 믿고 그 사람의 편에 달라붙은 그 접착력을 믿을 수가 없었다. 끈끈이주걱도 이만큼은 비굴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회는 3시부터 시작되었지만 민주노총과 철도노조의 릴레이 연설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죽어간다는 절규 어린 연설이 계속되었다. 한겨레와 시사인에서는 무료 신문을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발바닥이 땅에 오랫동안 달라붙어 신발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웠다. 콧물이 자꾸 났다. 수많은 사람들은 탄핵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분명히 국회에도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데시벨이었다. 핸드폰으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몰려들었다. 나는 만일이라도 그 자리에 잘못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깃발 아래에 가서 앉았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초콜릿이며 과자며 건네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생길 만큼 가까울 일인데, 동시에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국회는 너무 멀었다.


시간이 되어 탄핵소추안 발의 시간이 되었다. 김여사 특검법엔 잘도 투표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떴다. 우리는 모두 그 비겁함을 지켜보았다. 국회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돌아오라고 외쳤다. 투표를 하세요. 찬성이든 반대든. 시민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투표조차 하지 않는 비굴함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왜 우리가 비굴하게 표를 내는 일에 구걸하듯이 당신들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은 아마 속에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켜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1980년의 그날처럼, 한 도시를 공격하며 외부엔 전혀 알려지지 않는 그런 세상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동시에 이것이 모든 악업들의 종지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누군가가 공무원 할 사람이 왜 거기 가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하고 많은 떠올랐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국회 및 지방의회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계엄령 포고령을 본다면, 지금의 나는 훌륭한 먹고사니즘을 위해 거길 갔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내 밥줄이 갑자기 일어난 계엄령 때문에 제가 지방직 공무원으로서 할 일이 없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예, 저 먹고살려고 갔습니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다음에도 갈 생각이다. 내 먹고사니즘을 관철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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