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마인>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서른이 넘은 나는 먹고사니즘 이상의 이념을 알지 못한다. 20대 내내 게으르고 방만한 죄였다.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 노래를 부를 깜냥이라도 있었지, 나에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쥐꼬리만큼 남아있던 영어에 천착했다. 호주에 살면서 늘었던 건 통밥으로 알아듣는 영어 듣기와 에세이를 쓰기 위한 영어를 꿰매는 실력뿐이었다. 그걸로 어찌어찌 세상을 살아갈 돈을,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중 모 출판사 편집자였던 S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언니, 이 책 아마존 서평을 번역해 주실 수 있나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회사 내부에서 꼭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아마존 서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아마존 서평을 번역했다. 조악한 영어 실력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나에게 그 일은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무능함을 이겨내고 사회에 필요한 일원이 되는 어떤 종류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S는 그마만큼 의 노동에 대해 맛있는 밥으로 환대했다. 나는 매우 기뻤다. 밥을 얻어먹어서 기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세상에 쓸모가 있고 그 노동에 대한 가치를 환원받는데서 오는 기쁨이 있었다.
책을 엮어나가면서 번역자는 따로 붙었지만 S는 원고를 바라보는 편집자 입장에서 때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결국 S는 그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다른 출판사로 옮겨갔지만, 분명히 이 책에는 나와 이 친구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동시에 이 일은 내가 이후에 할 여러 가지 노동 중 가장 기초적인 뿌리로 남게 되었다.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할 때, 사람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손에 집히는 물성이 있는 단단한 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찾게 된다. 나에게는 이 책, <에너미 마인>의 노동이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회사를 옮긴 S와 상수에 있던 모 일본식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이 책이 다른 사람들의 손을 타고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잠시 그 사이동안 지나온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결국 무언가가 우리를 타고 흐르는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곧 다시 S를 만나 <에너미 마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언젠가 내가 삶에 대해서 회의감과 내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될 때, 굵은 철봉처럼 나를 잡아주는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아껴 읽을 것이다.
어떤 책에는 장막 속에 가려진 출판인과 번역가가 있었다. 나는 숨겨진 편집자 S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