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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하 Jan 17. 2023

#6

의식의 흐름 기록 : 공포영화 주인공되기

# 팬데믹 이후 퇴사 > 브랜딩 > 공포영화의 주인공 > 조르바와 무화과 >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 스크래치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서 프리랜서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프리랜서 플랫폼들이 그렇게도 문전성시라고 한다. 수요도 많고 공급도 많은 게 진짜일까? 아직 퇴사 전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는 게 아니다 보니 포트폴리오도 고려할 게 많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일할 때 만든 것들은 포트폴리오로 사용할 수가 없다. 개인 작업물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꽤나 볼륨이 큰 일이다.

요즘은, 나를 브랜딩 하는 게 중요하다던데. 싱어 송 라이터를 하려 했을 때와 달리 편집 디자인 프리랜서로 브랜딩 한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싱어 송 라이터는 어쨌든 내 안의 이야기를 쓰고 내 안의 이야기를 직접 시연하는데, 디자이너는 "당신의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시연해 드려요!"라고 이야기한다.

브랜딩이라.. 분명 나의 취향이 드러날 텐데.. 내부적으로 내가 '나'라는 콘텐츠를 고민할 때에 외부적인 걱정으로 희석되는 것을 제한해야 할 때가 있다. 완전히 배제하라는 게 아니다. 시장의 요구를 묵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내부의 콘텐츠를 풀어갈 때 외부적인 요소에 공격당해 내면의 소리가 입을 다물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고민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음.. 사실 이 생각도 다 헛짓거리 일 수 있다. 결국은 시장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할 테니.


그래도 고민은 해보련다. 내 취향과 작업 가능한 볼륨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이것도 그저 내 욕심일까? 어차피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면,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궁금한 건 보고, 의심되는 것은 덮어놓지 말아야 한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냥 도망치지 않고 덮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욕망'하면 떠오르는 인물, 조르바. 읽은 지 좀 오래되어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조르바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내게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아니 하나에 꽂혔다. 욕망하면 조르바처럼 다시 욕망하지 않을 정도로, 미련을 두지 않을 정도로 무화과를 먹어버리자! 왜 누구나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릴 때 헌 신발 때문에 창피당해서 혹은 신고 싶던 신발을 사지 못해서 생긴 한정판 신발 모으기 취미 같은 거.  


그냥 배를 채우면 지나갈 배고픔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큰 스크래치가 되어 그 흉터를 곱씹게 될 배고픔인지를 알아채는 방법이 있을까? 진심이어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방법 같은 거. 나는 그럴 때면 명제되지 않는 무언의 감정이 묻혀있는 기분이 든다. 이를테면 불안이나 불편함 혹은 너무 좋아서 거부하고 싶은 날뜀.(입덕..부정기?) 이런 것들이 묻혀있는 것 같을 때에는 이 마음의 정체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우선 기다려본다. 함부로 돈과 시간과 마음을 쓰지 않도록. 이제 내 진심과 열정은 젊지 않으니까.


그리고 취향 찾기. 어떤 사람들은 스크래치가 취향이 되고 덕질로 이어진다. 칭찬과 좋은 기억만이 취향, 취미, 관점을 주는 게 아니니까. 상처로 인해 생긴 굴곡에 무언가를 채우며 반복한 것이 그의 삶의 방식과 관점을 결정하기도 한다. 내 디자인의 취향이라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려 한다. 음악의 취향은 꽤나 나열할 수 있는데, 디자인은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이게 참 재미있는 게, 음악을 듣는 취향과 내가 부를 수 있는 취향 그리고 작곡하는 취향은 다 달랐다. 결국 듣고 부르며 소화해서 내가 다시 내뱉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처음 접한 음악이었달까? 디자인은 과연 어떤지 궁금하다. 내가 보고 예쁘다 하는 것과 작업해서 결국 소화해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니까. 

취향이란 것은 어떤 내적 외적 사건 사고로 변화하기도 하니까 음악도 오랜만에 다시 꺼내어봐야겠다. 예전처럼 노래연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만에 노래도 부르고!


요즘 내가 기다리는 마음의 정체. 아직 무르익지 않은 과실. 그 무엇들 중에 어쩌면 가장 큰 것은 계속 내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용기에 근거한 믿음인 것 같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믿음'이라던데. 그럼 보이는 것을 믿는 건 '확인'인거겠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거니까 난 꾸준히 불안해할 것 같다. 하지만 불안해야 공포영화 주인공처럼 의심되는 것을 들추고 불안해야 해소하기 위해 욕망할 테니까...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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