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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기록 Apr 25. 2019

같은 길에서 만나요.

마미 마이 아일랜드 : 4일 차 이야기

분명 여유 있게 일상처럼 살아내자고 온 건데 왜 이렇게 지치는 것인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패키지여행'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는 딸은 나뿐일까..?

@이시가키항 리토 터미널
다케토미로 향하는 혜영씨
엄마의 카메라, 얼른 필름 뽑아보고 싶다

오늘은 이시가키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기에, 가까운 섬에 가보기로 한다.

다케토미 섬.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며, 배우 고현정이 쓴 책을 읽어보았는데 앞부분 그녀의 일행들이 여행한 곳이 바로 이 곳, 다케토미 섬이다. 의외로(?) 책이 굉장히 잘 읽히고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오늘의 이시가키는 32도. 체감온도 38도.

생각이랄 것도 할 수 없는 해파리 상태로 기계처럼 움직여 다녔다.

중간중간 엄마를 뫼시고 있는 내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혜영씨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맞춰준다고 행동했으나, 날이 너무 덥고 습하고 볕은 따가워 표정관리라던가, 말투가 곱게 나갔을 리가 없었을 것 같다.

오늘의 일기..는 고현정씨가 대신 써주실 것 같다.

마을의 초입부
마을에는 골목이 많다. 직선으로만 통한다는 악한 기운이, 꺾인 골목들을 만나면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집집마다 입구 가운데에는 사람의 주먹만한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돌 담장 ‘굿구’가 서 있다. 악한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서 태풍이나 강풍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외부의 시선을 가림하는 장치다. 그래서 사람도 입구에서 방까지 직선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돌아 들어가야 한다. 돌담은 제주도와 비슷한 풍경. 다만 제주도가 현무암이라면, 다케토미는 산호돌이다. 맞다, 다케토미는 해저가 꺼지면서 산호가 솟아올라 만들어진 산호초섬. 산호는 아주 느리게 자라기 때문에 돌담에 쌓인 어린아이 머리만한 크기가 되려면 2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 또 산호는 죽으면 하얗게 변한다. 그래서 새로 만든 산호 돌담은 원래 하얗다. 마을의 돌담들처럼 까매진 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때가 타서 그렇다. 또 돌담에는 빈틈이 있지만 웬만한 태풍에는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이 있다. 겹쳐놓은 산호의 돌과 돌 위로 비가 내리면 죽은 산호로부터 석회가 녹아 나와 다른 산호초 위에 침적되고 서로 묶여서 더 단단해지는 것. 산호섬 바닥도 마찬가지로 석회물 위로 죽은 동식물이 채워지고, 이들의 잔해나 시체들은 섬의 흙으로 변한다. 결국 이 다케토미 섬은 죽음이 쌓여 살아 있는 것들을 보호해주고 악한 것은 침범할 수 없도록 해주는 곳이다.                                                 <고현정의 여행, 여행>

나고미의 탑은 다케토미 섬의 거의 중심에 있는 언덕에 있는 마을 유일의 전망대다.

이게 전망대라고? 싶을 정도의 높이 고작 5m지만, 놀랍게도 정말 이 곳에 올라오면 마을의 전경이 전부 보인다.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전통 붉은 기와와 집들, 하얀 골목길들이 한 눈에 보인다. <고현정의 여행, 여행>은 정말이지 이시가키 섬 여행 준비나 정보를 찾는 것이 아주 귀찮을 때 술술 읽히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산호 돌담
이곳에서 산호는 유추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세월 동안 땅 위로 올라와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깎이고 섞였다. 원래의 모습은 끝까지 다 소진되고 알알이 부서져 하얀 길을 만들고 겹겹이 쌓여 돌담을 만든다. 산호를 보면 나도 뼛속까지 다 소진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싹 다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담아내고 싶다.  <고현정의 여행, 여행>
시샤와 바람

마땅히 가이드도 없는 여행이라, 우리에게는 배우 고현정이 가이드와 다름없었다.

특히 엄마는 이 책을 굉장히 좋아해서 '신이 머무르다 간 바다래'라거나 '별 모양 모래는 행운을 가져다준대'라거나 '정령 나무를 보고 싶어'하며 책을 따라 여행하고 배운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삼각대를 무겁게 들고 다녔던 이유

고현정 님, 정령 나무는 이런 것이 맞습니까?

물 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콘도이 비치'

새하얀 모래 해변이 그대로 비치는 에메랄드 그린색 콘도이 비치는 파도가 거의 없이 잔잔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나 스노클링, 해수욕에 적합하다. 수심도 얕아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 그래서인지 카이지 해변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콘도이 비치부터 카이지 비치까지 걸으며 별모래를 찾아 헤맸다
모네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혜영씨다
그 앞에서의 기념사진

사실, 오늘 정말 땡볕에서 걷고 또 걸은 우리는 거의 "서 봐" 혹은 "거기 그대로 있어봐"라는 대화만 했던 것 같다. 나도 엄마도 기억나는 거라곤 '오늘의 체감온도는 38도'와 '같은 카페 2번 연속으로 가기'정도랄까.

파인애플 나무라고 그냥 우리끼리 정했다

다케토미 섬은 정말 작다. 우리는 아침 9시에 들어가서 마지막 배를 타고 돌아올 작정이었는데, 마을을 돌고 또 돌고 카이지 비치에서부터 콘도이 비치까지 걷고 또 걷다 보니 기진맥진하여 4시 15분 배를 타고 복귀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의 모토와는 반대로 '여행은 뽕을 뽑는 거야'처럼 다닌 어제, 오늘이랄까.

아무래도 오키나와 본섬에서의 시간은 많지만, 이시가키와 같은 부속섬은 지금뿐이라 마음이 급한 게 당연하기도 했다. (라고 변명을 해본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가던 프랑스에서 온 여행객이 찍어준 모녀의 사진
남편이 보고 싶은 새댁

카이지 비치에서 만난 프랑스 여행객이 자신이 주운 별 모래를 하나 나눠주었다. 단 두 개를 찾았다고 했는데, 나는 하나도 찾지 못해 실망하고 있으니 '프레젠또'라며 준 것이다. 완전 '멕시보꾸' 세 번 연달아하고 바이 바이 후, 신나서 인증샷을 찍어 남편에게 보내주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강풍이 불어 모래가 날아가 버렸다. 너무 당황하고 또 서글퍼진 나는 "역시 나에겐 행운 같은 건 없는 거야"라며 내가 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것인지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옆에서 지켜본 엄마가 한마디 보탰다. "남이 준 행운 같은 건 원래 네 것이 아니었던 것뿐이야."

나의 현명한 혜영씨

그런 말을 남기고선 쿨하게 다시 모래를 찾아 헤매던 엄마.

결국 엄마는 작은 별모래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너는 내 분신이니까 괜찮아"라며 내게 주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가는 길에 100엔을 주고 별모래가 가득 들은 약봉지 파우치를 샀다. 이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와 반절 나누기로 했다.

인생은 길이다. 그 길에서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하고 안정을 꿈꾸며 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거나 같은 자리만 뱅뱅 돌고 있다면 불안의 불씨를 끄지 못하고 안식을 점화하지도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주 느리더라도 분연히 일어나 발을 떼야 한다. 그 길은 얼기설기 섞여서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내 뒷모습을 보이고 서로를 지나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지나간 발자국을 누군가 똑같이 지나다 볼 것이고, 나도 누군가 남겨놓은 꽃을 만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와 방식, 방향으로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또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단 하나의 종착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보다는 아주 천천히라도, 아주 작은 폭이더라도 길을 걷다보면 만날 사람은 만나고 보아야 할 것은 보고, 들어야 할 것은 들릴 것이다.                                                   <고현정의 여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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