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 마이 아일랜드 : 15일 차 이야기
엄마들은 왜 이렇게 자식들한테 미안한 게 많은 것일까.
우리 혜영씨 역시 굳이 여기까지 여행까지 와서도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이유는 자신은 행복하고 나는 스케줄 체크만 하는 것 같아서, 란다.
참으로 엄마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가 싶다.
내가 고3이었던 시절.
당시의 나는 미대 입시를 위해 11시까지는 미술학원에서 실기 준비를,
그 후로부터 새벽 1시~2시까지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수능 공부를 하던 때였다.
학교 스쿨버스는 6시 40분 정도에 집 근처 정류장에서 출발하니 돌이켜보면 정말로 수면시간이 부족했다.
은퇴 전, 엄마의 직업은 우정공무원. 그리고 20년째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던 한 며느리였다.
공무원들은 정기적으로 급수시험을 본다. 이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한다면 급수가 오를 수 없다.
하지만 그 시험은 굳이 안 봐도 되는 시험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위해 함께 독서실을 끊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새 밥과 새 국을 먹어야 한다. 아니, 당신의 아들에게 먹여야 했다.
엄마는 20년간 새벽 5시에 일어나 매일같이 새 밥과 새 국을 끓였다.
(물론 할머니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계시기도 했다.)
엄마는 아직도 "너희 고3 때 엄마가 해준 것도 없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대단하지 않은가.
5시부터 일어나 매일같이 시어머니와 함께 아침을 차리고 8시까지 출근해서 6~7시에 퇴근,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또 시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짓고 과일을 깎고 한 시간 가량 쉬다가 11시에 버스정류장으로 출발해 딸을 만나 새벽 1~2시까지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했다. 6개월가량을.
내가 아직 자식이 없기도 하지만, 만약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엄마는 알까. 그때 새벽 공기를 함께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나에게는 엄청난 위로였고 감사였고 미안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래왔다.
내가 정말 힘들었던 시절, 엄마는 묵묵히 곁에 있어주었다.
고3 때도 그랬고, 대학시절 졸업작품을 준비할 때도 그랬고, 첫사랑의 쓰라린 아픔에 정신을 못 차릴 때도 엄마는 별말 없이, 불필요한 행동과 물질적인 대안이 아닌, 그저 곁에서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구태여 '힘을 내라'는둥,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면 이렇게 해야 한대'라는둥 뭔가를 요구하거나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고 따스한 손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다.
난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는 메시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 뭔가 모를 위로를 받고 싶다든가, 힘들 때 그냥 누군가 옆에 있어주어 내 얘기를 들어만 줘도 좋고, 함께 있어만 줘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꼭 함께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편히 옆에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서 네가 제안한 오키나와의 한 달 살이가 나의 여행이 아닌 네가 맘 편히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맘으로 왔는데 엄마만 너무 행복하게 지내고 넌 뭔가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스케줄 체크를 하는 게 너무 미안하기만 하구나. 여기 있는 동안 모든 날이 다 행복할 순 없지만, 그래도 단 며칠이라도 기분이 전환되어 마음에 평화와 안정이 온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책을 보니까 여행은 바로 거기에서 뭔가를 얻으려 하는 게 아니고 여행이 끝나 돌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변화가 생각다고 하던데 엄마도 살짝 기대해 본단다. 너도 의미 있는 엄마와의 여행이었기를 욕심 내본다.
나는 40이 되어도, 50이 되어도 혜영씨에게 평생 딸랑구 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