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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기록 May 07. 2019

사진으로 남기지 않더라도

마미 마이 아일랜드 : 16일 차 이야기

마미 마이 아일랜드 : 18일 차 이야기마미 마이 아일랜드 : 18일 차 이야기

나를 아이슬란드로 데려다 놓았던 여러 계기 중 하나인 영화가 있다.

바로 2013년에 개봉했던 벤 스틸러 감독, 주연에 빛나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정말 좋아하는 대사와 장면과 음악이 넘쳐나는 영화인데, 오늘은 그중 어느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정말 멋진 순간에 나를 위해서,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이 순간에 머물 뿐이야. 바로 이 순간. 그리고 여기."


영화 리뷰글은 아니니 바로 스킵하고, 오늘 하루는 그런 하루였다.

나무가 울창한, 초록으로 둘러싸인 숲 속 나무집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는 이 나무집 주변을 뱅뱅 도는 반딧불이를 엄마와 함께 보았다.

(나는 무주에서 일할 때 꽤 봤는데, 엄마는 난생처음 본다고 했다.)

근처에 부엉이가 있다고 해서 꽤 오래 부엉이 울음소리를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눈을 뜨자마자 오키나와에서만 서식한다는 아카쇼빈AKASHOBIN의 노랫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카메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려 침실을 나섰는데, 아침 빛이 들어오는 거실이 너무 아름다운 거다.

와, 이건 찍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눈을 뷰파인더에 가져다 대는 순간 갑자기 번쩍 하고 섬광처럼 저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 그냥 찍지 말자'

그저 그 순간을, 여기를 내 두 귀로 두 눈으로 담는 일.

사진으로 찍지 않아도 새길 수 있는 힘.

오늘은 그런 연습을 하고 싶었다.

카메라를 손에서 내려놓고 대신 혜영씨의 손을 잡고 사이좋게 잠옷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갔다.

'휘-루루루루루루'하고 운다는 아카쇼빈의 노랫소리가 여간 듣기 좋은 게 아니었다.

아카쇼빈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에 살랑이는 나뭇잎들의 바람 소리까지 마치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듣는 기분이었다.

엄마를 테라스에 앉혀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천천히 드립 커피를 내렸다.

(모두 숙소에 구비되어 있는 물품들이다. 오가닉 원두까지..!!)

지저귐과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8시에 예약해둔 조식이 방으로 배달됐다.

@프라이빗 롯지 코텐치 의 아침 조식

'어머, 이건 찍어야 해!'

참고하시라.. 이 숙소는 정말 낙원이다.


지금은 김영하 작가의 신간 <여행의 이유>를 읽고 있는데, 초입부의 흡수력이 대단하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여행담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다.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다.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대체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 그런데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추구의 플롯'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주인공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여행기가 '추구의 플롯'으로 쓰일 수 있고, 쓰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이런 목표는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와이에 가서 서핑을 배우겠다, 치앙마이에서 트레킹을 하겠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인도에 가서 요가 클래스에 참가하겠다. 유럽 전역을 떠돌며 미술관을 둘러보겠다 같은 것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수단을 검토한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사실, 내게도 이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제 엄마가 카메라를 떨어뜨려 그야말로 고장이 난 것이다. 원래 이 여행의 외면적 목표는 '4주간 오키나와를 여행하며 엄마가 찍은 사진과 딸이 쓴 일기'로 출판물을 제작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강력한 바람의 내면적 목표도 있었겠지. 아마도 그것은 나의 병에 관한 것이었으려나. 어쨌든, 엄마의 사진은 더 이상 찍을 수 없게 되었다. 2주간 찍은 그 사진들과 지금 오키나와에 있는 한 롤이 전부인 것이다. 필름 카메라, 아니 카메라 자체의 초보자인 엄마에게 FM2의 사용법은 어렵고 그 카메라를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모험적이다. 디지털카메라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무드와 맞지 않다. 처음에는 엄마가 "여기서 찍고 싶어"라고 하면 엄마를 그 위치에 세워두고 내가 초점과 조리개 값을 맞춘 후 우리 둘의 자리를 그대로 맞바꿔 셔터만 누르면 되게끔 설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니와 내 표정이나 몸짓이 너무 굳어버리는 것 아닌가. 이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 그렇기에 어제부터 오늘까지 꼬박 1박 2일을 고민한 결과, 그냥 과감하게 기존의 목표를 버리기로 한다. 기획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편지를 쓸 것이다. 서로 다른 24명에게. 대상은 서로가 될 수도 있고, 이 세상에 없는 망자가 될 수도 있고, 실존 인물이 될지, 가상 인물이 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이 편지들로 인해 우리는 단지 이 여행뿐만이 아닌 자신들의 인생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기획을 가지고 출판물까지 연결을 할 수 있을지, 그저 영상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는 일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미놀타여. 버블경제 최고의 작품이라더니, 그렇게 쉽게 망가지기 있냐고요. 너무 절망적이다. 한국 가서 수리하면 될 일이긴 하지만, 나는 또 이렇게 여행자 보험에 신세 지게 생겼구나.. 어차피 엄마 실수로 엄마가 처리할 문제이긴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내게 또 다른 외면적 목표가 있긴 했다. 나는 이 여행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할 것이라고 했다. 오키나와에 가서 훌라춤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숲 속 오두막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작은 오솔길을 빠져나가 영화 <안경>에서 봤던 바다에서처럼 요가도 할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어떤 줄 아는가. 우쿨렐레는 짐이 너무 많아서 챙겨 오질 못했다. 훌라춤 대신 6월에 대회가 있다는 엄마를 위해 함께 라인댄스를 연습해주고 있다. 그림 그릴 시간이 어딨어. 일기도 겨우 쓰고 있는데. 숲 속 오두막에서 하루 종일 있기는 하지만, 작은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있던 그 바다는 알고 보니 차 타고 15분 가야 하는 거리의 장소였다. 말 그대로 아고다에게 낚인 것이다.(바다만큼은) 아아, 여행이란 절대로 나의 외면적 목표에 완벽하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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