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MMYRECOR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의기록 May 12. 2019

그 많은 장미는 어디에서 왔을까

마미 마이 아일랜드 : 21일 차 이야기

오늘은 그야말로 충동적인 바람이 일었다.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눈이 떠졌고, 고개를 돌리니 핑크색 여명이 흐린 구름과 부딪히고 있었다. '아, 오늘 날씨도 글렀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이럴 때면 곧 루틴처럼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게 된다.


첫 번째로는 자고 있는 사이에 도착한 카카오톡을 확인하고, 두 번째로는 자연스럽게 인스타그램의 아이콘을 누른다. 한참을 나와 내 지인들의 피드를 둘러보다가 그래도 무료한 기분이 들면 그 세상을 빠져나가 다른 짓을 찾아본다. 어떤 때는 네이버 웹툰을 보고, 또 어떤 때에는 네이트 판에 접속해서 세상 사람들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엿본다. 오늘의 경우에는, 여행 어플을 눌러봤다. 이곳에서의 진정한 마지막 날이 오늘이어서 그런 걸까. 남부에 일주일 가량을 머무르며 날씨 탓만 하다가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결국 내일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난 거였나.


'트리플'이라는 여행 어플은 의외로 쓸모가 많다. (이렇게 말하면 관계자들분들이 서운해하시려나) 정말이지 여행책 한 권을 챙겨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처럼 사전 계획이나 서칭이라는 과정을 여행 준비에서 개나 줘버린 무심한 여행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상황이 닥치면 보장된 장소에 가고 싶어 하는 이상한 심보를 가진 여행자라면 '트리플'은 최적의 아이템이다. 나와 남편은 앞서 말한 종자의 인간들로, 명소라던지 맛집이라던지 여행 전에 찾아보는 일이 없지만, 막상 그 여행지에서는 보장된 장소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럴 때면 '트리플'을 켜 내 주변에서 가장 가깝거나 별점이 높은 음식점을 검색해본다. 한국인들이 많이 여행하는 장소일수록 그 성공확률은 높아지고, 가까운 예로 교토에서는 '트리플'만 믿고 여행했더랬다. ('트리플'이 추천해준 흑돼지 돈카츠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키나와에서 '트리플'을 켤 일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엄마를 모시고 오는 여행이었기에 망나니 같은 스타일의 나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사전 계획' 과정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구글맵에 깃발을 꽂아 넣기 시작하자 오키나와의 어느 땅은 마치 내가 정복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초반부의 열정.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이 시기의, 이 지역의 깃발은 겨우 4개뿐이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 바다가 보이는 커리집, 바다가 보이는 신성한 제사를 올린 성지. 이럴 수가. 깃발을 꽂아 넣던 과거의 나는 바다에 미친 게 틀림없었다. 3주 내내 바다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느낀 것은 바닷가는 정말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코우리 해변이나 이시가키 섬에서의 그것들과는 달리 이곳 남부에서는 장마가 일찍 시작된다는 뉴스대로인지 매일매일이 흐린 하늘의 연속. 따라서 바닷가 역시 말은 태평양인데 보기엔 서해의 어느 해변가 같다. 초반 며칠간은 날이 흐려도 남부를 즐기겠다며 산보도 나가고 깃발을 꽂아놓은 장소들도 섭렵했으나 날이 갈수록 흐린 하늘처럼 마음도 시들해졌다. 그런 날들이 이어져 온 나였는데, 오늘은 특별히 '마지막'이니까, '트리플'을 한 번 켜본 것이다. 남부지역의 보장된 장소를 오늘 한 군데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일념 아래.


그렇다면, 그 '보장된 장소'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1. '트리플'어플을 켠다.

2. 내가 지금 활동 중인 지역의 장소가 자동으로 켜진다.

3. <관광> 아이콘을 클릭, 주변 3km로 되어있는 검색 반경을 '남부'로 확대시킨다.

4. 거리순 정렬을 추천순(혹은 리뷰 순)으로 변경한다.

5. 스크롤을 내리며 내가 흥미로운 장소를 확인해본다.

자, 이 간단한 과정을 지나치면 끝이다!

나는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섬, 세나가 섬'이 일단 눈에 띄었다.

공항 근처까지 가야 하나, 너무 먼 것 아닌가, 좀 귀찮은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아래 '바다 전망의 노천탕이 인기 있는 천연 온천, 류큐 온센'이 눈에 띈다.


내부 이미지를 촬영 할 수 없어서 호텔측에서 업로드한 사진을 대신 올립니다.

류큐 온센을 클릭해보니 웬걸, 세나가 섬에 위치하고 있다. 길 찾기를 누르자 구글맵이 열리며 집에서 27분 거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친절하게도 맵코드도 나온다. 새벽 6시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류큐 온센. 여기다!

나는 7시 반에 급히 옆에서 자고 있는 혜영씨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온천에 가자, 온천!!!"

평소에 저혈압인 우리 어머니는 온천이라던가 사우나라던가, 그런 류의 장소들을 즐기지 못한다. 현기증이 나면서 숨이 막혀온다고. 하지만, 류큐 온센은 노천탕이다. 야외 온천..!! 바다가 보이고, 운이 좋으면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는 노천탕. 나는 어차피 온천을 가니까 씻지도 말고 당장 출발하자며 노래 노래를 불렀다. 엄마는 처음에 거절했다. 엄만 온천 가기 싫고, 그냥 너 혼자 다녀오면 안 되겠냐고. 거리가 차 타고 30분 거린데 나 혼자 어떻게 가냐고 하니까 일단 데려다주겠다고 하시더라. "아아, 싫어어- 같이 들어가아-!!" 다 큰 서른두 살의 딸이 온갖 애교(생떼)를 부리며 엄마를 졸랐다. 왠지는 몰라도 오늘만큼은 엄마와 무조건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었다. 결국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엄마와 딸은 수영복과 간단한 씻을 거리를 챙겨 세나가지마로 출발했다.


도착해보니 그곳은 <호텔 류큐 온센 세나가지마>에 속해있는 호텔 온천이었다. 투숙객은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것 같고, 우리처럼 온천욕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인당 1만 5천 원가량의 돈을 내고 입장을 해야 했다. (호텔 투숙객은 '인피니티 풀'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도 수영복 가져왔는데 게스트가 아니라 입장 못함..ㅠㅠ) 가져온 수영복이 아까우니 한 번 더 입자고 설득해서 엄마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그야말로 정말 노골적인 온천이었다. 기왕 온 거, 즐깁시다! 하며 모른 척 서둘러 들어갔는데 웬걸, 일단 실내 온천 입욕장이 온통 핑크인 거다. 작은 일본식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핑크색 온천탕에 장미꽃밭이 펼쳐졌다. 크기도, 종도, 모양도, 색도, 심지어 향도 다른 온갖 종류의 장미가 50명은 거뜬히 소화할 듯 커다란 탕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야외 온천과 이어져 바람도 솔솔 불어오는 게 엄마의 현기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고. 엄마와 나는 평소엔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 장미 꽃탕을 보자 꺄아, 손을 모으며 함께 탕에 들어섰다. 가까이만 있어도 코끝을 찌르는 이 어마어마한 장미꽃들. 와, 인피니티 풀보다 훨씬 좋아! 라며 우리는 장미 속에서 노곤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든 생각. 이 수많은 장미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얘네들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애들이 여기에서 만난 걸까? 아니면 같은 밭에서 자란 애들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교토에서 장미 정원에 갔는데 한 송이도 못 봤었지. 오키나와는 따뜻해서 장미도 일찍 피는구나. 아, 이렇게 머리가 잘려서는 예쁘고 커다란 얼굴만 온천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이 장미꽃들, 남탕에도 있을까? 근데 수입 장미 같은 애들도 많이 보이는데, 네덜란드 같은 곳에서부터 와서는 이런 온천탕에 둥둥 떠다녀도 괜찮은 거야? 장미 농장 주인은 쓰임새가 여기였다는 걸 알면 어떨까? 의식의 흐름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시각, 촉각, 후각이 행복한데 이 장미들의 운명을 생각하게 되니 어쩐지 인간이 너무 잔인하고 미안한 존재라는 죄책감이 생기는 거다. 이 장미꽃 온천탕을 기획한 호텔은 으쓱, 했겠지. 우리 호텔은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온천탕을 가지고 있다고. 이곳에선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실제로 엄마와 나도 처음 들어서자마자 보고 '우와' 감탄하며 이 탕에 몸을 집어넣고 꽃들을 만지며 향을 맡는 행위를 행복에 겨워했으니까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미꽃 온천탕 같은 거 없어도 우리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나요? 바다를 보며 온천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거라고요.

* 집에 돌아오고 난 뒤, 알 수 없는 울적함에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이럴 수가. 오늘 12일은 일본에서 '어머니의 날'로, 저 장미 1000송이의 온천탕을 준비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집안 욕탕(?)이라고.

횡재.. 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아,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장미들에게 미안해진다. 하지만 온몸이 부들부들하고 아직도 장미향이 몸에서 나는 게 행복한걸!!!!!! 하필이면 이런 날 갑자기 엄마와 온천에 가자고 한 나의 직관력에 감탄스럽기도 하고!!!!!! 오늘 단 하루뿐이니까 면죄부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는 이런 모습이네요..!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가져온 사진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을 낭비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