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 마이 아일랜드 : 22일 차 이야기
오늘은 남부의 바닷마을에서 나와야 하는 날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나하 시내의 작은 호텔에 들어가야 한다. 어제는 그래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 마을의 진짜 마지막 하루였으니까. 그런데 오늘이 되니 오늘이 진짜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이 든다. 마지막 렌터카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막판에 업체 근처 세나가지마나 다시 한번 가서 비행기 구경을 할까? 아니면 옮길 호텔에 짐을 먼저 맡겨둘까? 어떻게 해야 이 마지막 렌터카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여행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도 중요하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여행기간 동안 아무리 즐거웠어도 마무리가 어정쩡하면 그 여행 전체가 어설퍼지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진짜 중요한 날은 오늘부터다. 오늘부터 2박 3일의 날들이 우리 여행을 결정하는 거니까.
가만, 그렇게 생각하면 어제는 중요한 날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의 괴상한 망상은 아마도 16살부터 시작된다. 모두들 나에게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만 진학하면 모든게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렇게 16살의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모든 생활을 정리할 정도로 공부에 집중했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19살. 수능을 망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대학입시가 남은 내 모든 인생을 결정할 거라고, 모두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수능을 망쳤다. (게다가 정시도 3군데 중 2군데가 황당하게 실격 처리당했다.)
20살. 내 첫 20대의 시작. 이때 만나는 친구들과 과생활이 남은 대학 생활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다들 말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어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 먹어가는 동안에는 여전히 창창하고 반짝이는 싱그러운 젊음의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특히 남자)의 짓궂은 '꺾였다'는 놀림에 진정 내 젊음은 22살에 끝난 줄로만 알고 절망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으로 내 취업 인생을 확정 지을 아주 중요한 졸업전시를 준비해야 하는 4학년을 앞두고 있었다. 무서움에 이대로 내 청춘을 끝낼 수는 없다고 휴학 신청을 하고는, 그 길로 친구와 함께 서울의 아카데미로 떠났지. 그때부터가 본격적이었을까. 덧없는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휴학생의 압박을 느끼며 23살. 이 휴학 시절이 내 인생에서 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고 24살, 4학년을 맞았을 때는 또 역시 '졸업생'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여겼고, 그 후로 25살은 첫 직장이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 내 남은 인생을 결정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또 26살을 맞이하니, 난 이제 본격적인 어른이라고 여기며 허둥지둥 20대 후반을 맞이 준비를 하면서 지금이 20대 중심의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했고, 곧 27살이 되었을 땐 30살이 되기 전 제일 자유로운 나이라고 나 혼자 정하고선 머릿속과 가슴속에 있는, 소위 쓸데없는 일들을 하나 둘 몰래, 혹은 대놓고 과감히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 쓸데없는 일들로는 영화제에서 일하기, 홀로 여행하기,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소규모 책방에 입고시키기 등이 있었다. 근데 솔직히 이때가 제일 행복하고 즐겁게 살았던 것 같다.)
1년은 금방 지나 28살이 되었고, 여전히 당시의 나는 그때 내 나이가 진짜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대가 끝나기 전에, 그러니까 29살이 되기 전에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을 단단하게 정하려고 28살 후반부가 나는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었다. 왜냐하면, 28살이 20대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나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29살. 29살의 나는 어땠는가. 역시나 마지막 20대 답게, '30대가 되기 전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지 다 정하려고 했었다. 29살에 들어간 회사가 내 인생의 마지막 회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또 1년은 금방 지나 30살이 되었고, 세계 공통 나이를 한국에도 도입해야 한다며 '나는 만으로 아직 20대'라고 우기고 다녔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30대쯤 됐으면 뭐라고 해놨어야 했는데,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었다. 30대의 시작을 허접하게 하다가는 남은 30대, 40대, 50대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만 같았다. 30이라는 나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31살의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이게 또 내 인생을 다 정리할 거라고 믿었다. 이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만 유지할 일만 남았다고, 이대로 내 인생이 끝까지 정해진다고 여기며 열심히 살아냈다. 그러나 결국 정신질환에 걸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32살의 지금의 나는 어떤가. '아기 낳기 전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지금 이 시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하고 싶은걸 도전하기)고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고 떠들고 있다.
이쯤 되면 나는 학습능력이 없는 걸까. 아니, 아마도 나는 33살에도, 34살, 35살, 40살에도 계속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겠지. 그렇다면 돌이켜보자. 과연 16살 때부터 나의 나이는, 인생은, 순간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나. 아니,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중요하지 않은 나이는 없다. 애초에 인생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니까. 모든 나의 날들은 소중하고 중요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겠지.
이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나이는 없거나, 중요한 나이 같은 건 없거나. 오늘도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서른둘의 이 하루가 지나간다. 이 여행도 끝이 보이며, 어느새 출국이 코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