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
26살의 나는 집이 없지만 어엿한 무주택 세대주이고, 세금이 이미 떼어진 월급이 입금되어 사실 느끼긴 어렵지만 성실 납세하는 직장인이다. 그러나 난 여전히 어른이 아니고, 그래서 여전히 늘 엄마가 필요하다.
요즈음은 격하게 인생 노잼 시기를 겪고 있다. 다 재미가 없다. 나의 작은 집에 혼자 앉아있을 때에 재. 미. 없. 어 라는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도 한다.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겨울로 넘어가는 이 계절이 너무나도 야속하고, 떨어지는 기온에 몸이 으슬으슬 추운만큼 마음도 떨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졌다. 주말에 신나게 놀아야지 하며 평일을 버티다가 문득 올해의 주말이 10번도 남지 않았음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섭섭해서 조금 울기도 했다. 아무튼 26살의 덜 자란 나는 이래저래 엄마가 더 필요했다.
그리하여 어제 저녁 퇴근 후, 나의 작은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물었다. "엄마 서울 언제 올 거야? 나 엄마가 필요한데." 그리고 더 뜬금없던 엄마의 대답.
"서울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갈게."
서울의 은행잎은 언제 노랗게 물들지...? 출퇴근길, 바닥에 떨어진 은행 폭탄을 밟지 않으려 고개를 처박고 조심조심 걸을 줄만 알았지. 고개를 들어 머리 위 은행잎이 초록인지, 연두인지, 노르스름한 연두인지, 샛노랑인지를 본적이... 있던가...? 없다.
이어진 엄마의 대답. "지난번에 간 돌담길 카페 있잖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 가보고 싶어." 이문세 콘서트도 갔다 온 우리 엄마는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라는 광화문 연가 노랫말만 오조오억 번 들어보았지. 실제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본 것은, 쉰넷의 여름. 바로 올해, 나와 함께였다.
26년의 짬으로 엄마의 취향을 아주 잘 아는 나는, 서울 곳곳의 카페와 식당, 핫플레이스들을 다니다 '아 여기 엄마가 좋아하겠다. 완전 엄마 스타일이잖아. 엄마 데리고 와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곳을 늘 기억해둔다. 그렇다 보니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엄마가 서울로 올 때면 패키지 관광 가이드 마냥 코스를 짜서 이곳저곳을 데려가는데, 돌담길을 걷다 보면 짠 하고 나타나는 카페도 그중 하나였다. 여름의 초록이 가장 싱그러웠던 때 엄마랑 손을 잡고 들어선 그 카페에서, '엄마-여긴 가을에 와도 진짜 좋아 은행잎이...'라고 흘리던 나의 이야기를 우리 엄마는 꼭꼭 기억해두고 있었나 보다.
KTX를 예매해주겠다는 나와 한사코 싫다는 엄마, 그럼 비행기를 예약해버린다고 협박하는 나와 쓸데없이 돈 쓸 생각이면 서울을 절대 가지 않겠다는 더 센 협박을 하는 엄마. 한참의 설전 끝에, 엄마는 결국 곧바로 다음 주에 서울로 오기로 했다. 장장 5시간 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엄마는 파김치 같은 것을 담은 네모난 통을 여러 개 들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겠지. 버스가 도시를 벗어나면 덜컹이는 차장 밖을 가만히 바라보겠지. 산에 가을이 물들어 수채화 같다던가 하는 어여쁜 생각을 하겠지. 그러다가 검지로 톡톡 한 글자 한 글자 나에게 카톡을 보내겠지. '딸. 하늘에 구름이 없어서 바다 같아. 딸 보러 서울 간다고 날씨도 화창한가 봐~'같은 다정한 말에 'ㅋㅋㅋ빨리 와'라는 성의 없는 대답에도 그저 행복해하겠지. 그러다가 한 시간 정도 까무룩 잠이 들겠지. 휴게소에 내려서는 따뜻한 라테 한 잔을 마시겠지. 아직 3시간이나 남았네 하며 지겨운 표정을 짓기도 하겠지. 그러다 휴대폰 앨범을 켜서 내가 찍어준 지난 서울 여행의 사진들을 보며 단풍처럼 발그레한 미소를 짓겠지. 꼭 서울로 수학여행 오는 여고생처럼 설레겠지.
우리 엄마, 내가 가장 잘 아는 취향의 소유자, 쉰넷의 소녀를 위해 이번에도 열심히 코스를 짜 봐야겠다. '서울단풍 명소', '돌담길 카페', '서울숲 은행나무길', '이태원 뱅쇼 맛집'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하다 글을 쓴다.
엄마가 서울로 온다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도시로 여행을 오는 일.
출퇴근길 그저 지나치는 은행잎의 색을
곰곰이 살피게 되는 일.
내가 이토록 지겨워하는 일상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와
함께 걷는 일.
월요일 출근길에는 은행 나뭇가지, 가지마다 매달린 색들을 살펴봐야겠다. 샛노란 잎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주어야지.
아- 우리 엄마, 나의 친애하는 소녀 미숙 씨가 빨리 서울로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