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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09. 2019

엄마에게 브런치 계정을 만들어 준 이유

그러니까 이 일의 계기는 바로 김장하는 날이었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수면잠옷 바람으로, 배춧잎에 양념을 묻히는 외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일 년의 양식을 준비하는 이 숭고한 노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온갖 이야기를 열심히 쫑알대었다. 어쩌면 양념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으로 등짝을 한 대 맞을지도 모르는 '밀레니얼의 결혼관'을 펼치던 중이었다.


내가 만약 30살이라면, 난 결혼 안 해.
여행 작가 할 거야. 난 여행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분명 내가 했어야 하는, 그쪽이 확실히 이상하지 않은 이 대사가 내가 아닌 '우리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이 일의 계기였다.




담아두면 답답하고 꺼내면 후회하는 그런 말이 있다. 대게 이런 말들은 직장 상사(aka 남) 앞에서는 그렇게도 잘 삼켜지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aka가족과 애인) 앞에서 이상하게 컨트롤이 힘들다. 김장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나란히 누워 대화를 나눴고, 나는 또 저 말을 참지 못했다. 우리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언성을 높였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을 감추는 대화 수법은 어떻게 이렇게 모두가 같은지. '주변에 딸 시집보낸 언니들을 보니~ 딸 시집보낼 때 그렇게 했다더라고~'라는 속이 빤히 보이는 말속에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어떤 마음으로 저 이야기를 곱씹었을지, 얼마나 고민을 하다 하나뿐인 딸인 나에게 털어놓았을지. 엄마를 정말이지 사랑하고 그래서 엄마를 정말이지 잘 아는 나는 그 모든 걸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서 그만 언성을 높여버렸다.

또 어쩜... 이럴 때에는 엄마를 아프게 하는 단어들만 잔뜩 떠오르는지, 꼭 못된 언어의 마술사가 된 것처럼 "집"에 대해 마구 마구 말을 내뱉었다. 집, 가정이 아닌 건축물 그 자체, 씩씩하고 명량한 우리 엄마를 금세 과거 고생의 기억에 파묻게 하는 단어. 자존감이 강하고 동시에 마음이 꽃잎처럼 여린 우리 엄마의 자신감을 꺾는 단어.


한바탕 큰 소리가 오고 가고, 갱년기라 불면증을 겪는 우리 엄마가 채 10시도 되지 않은 이른 저녁, 침실로 들어간 그 날. 그 하루 밤 사이, 나는 엄마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래 우리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어쩌면 나보다 새로움을 더 즐기는 것 같아. 그래 그런 엄마에게 고생의 기억이 켜켜이 묻은 이 집은, 오래된 냉장고 소리가 웽웽 울리는 이 작은 집은 아주 아주 좁겠다.
그래 우리 엄마는 글 쓰는 걸 참 좋아하지. 난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 김밥 통 안에 엄마가 넣어둔 비밀스러운 쪽지를 꺼내어 보는 것이 보물찾기 게임보다 더 짜릿하고 행복했어. 그래 그런 엄마에게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문구를 적어두는 어디 은행인가 보험사에서인가 받은 못생긴 수첩은 아주 아주 부족하겠다.

그래서 그 밤, 나는 엄마에게 브런치 계정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해의 몸짓으로 엄마에게 다가가 화해의 눈짓으로 근처 새로 생긴 카페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꽤 테이블이 차 있었다. 커플, 애기 엄마, 친구들, 그리고 혼자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무엇인가를 타이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브런치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엄마의 눈빛은 한없이 반짝였다. 어쩌면 카페에 들어섰을 때 본, 노트북 작업을 하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잠깐 상상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옆에 두곤 타닥타닥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50대 여자.


엄마는 필명과 본인을 소개하는 한 줄을 어렵지 않게, 빠르게 결정했다. 이 하얀 미지의 공간에서 엄마가 시작하기로 한 몇 가지 단어들은 정말이지 너무 너무 너무 우리 엄마스러웠다. 정말 정말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난 절대 엄마의 닉네임을 잊지 못할거다. 차라리 내 이름을 잊는 편이 더 쉬울 것 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절대 엄마의 글을 먼저 검색해보지 않을 것이다.

이 브런치 공간은 '우리 엄마'가 아닌,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지금 30살이 된다면 기꺼이 세상 어딘가로 훌쩍 떠날,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수도 있는 여자 사람이 글을 쓰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니까.


언젠가 브런치 메인 화면에서, 브런치 요정이 추천해준 글에서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우리 엄마의 냄새를 맡고 닉네임을 확인했을 때 "와 씨 대박!!! 우리 엄마잖아!" 하는 날이 오길. '역시 엄마에게 브런치 계정을 만들어 준건, 2019년 겨울의 내가 가장 잘한 일이야!' 하며 나의 서울 집에서 혼자 어깨춤을 추다 아차차- 하며 엄마에게 기쁘게 전화를 거는 어떤 밤이 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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