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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06. 2019

딱 일주일 어치의 부지런함

게으른 일요일 아침에만 걸 수 있는 마법

08:03 10월 6일 일요일

이런 식으로 직장인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때문인지 주말에도 늘 늦어도 8시에는 눈이 떠진다.


09:07 10월 6일 일요일

베개를 고쳐 베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어보아도, 한참을 멍 때려도

여전히 이른 일요일 오전이다-


게으른 일요일 아침, 딱 일주일 어치의 부지런을 떨어보기로 결심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 어치의 부지런함.

새로운 일주일을 살아낼 힘, 딱 그만큼의 힘이 생길 정도로만.


침대를 기어 나와 머리를 틀어 올려 묶었다.


냉동실 맨 아래칸에 있는 식빵을 꺼낸다.

소분해둔 버터를 반 조각만 넣을까 늘 고민하지만, 늘 한 조각을 다 녹인다.

충분히 녹은 버터에 식빵 한 조각을 굽는다.

달궈진 작은 네모네모 팬에 버터가 녹는 모양이 참 좋다.

고소한 빵 냄새가 내 작은 공간에 가득 퍼지고 있을 동안

포트에 커피 물을 끓이고, 물이 끓기 전 어떤 잼을 발라 먹을지 고민을 끝낸다.

딸기맛 크림치즈, 고구마 잼, 언니가 여행을 다녀와 사다 준 카야잼

알록달록한 잼 병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하는 순간이 참 좋다.


일요일 아침에는 꼭 패브릭을 깔고 식사한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맘대로 정한 오늘의 패턴은 (두구두구) 그린 스트라이프 당첨입니다!

혼자 차린 간단한 아침이지만 패브릭을 깔고 먹을 땐 대접받는 기분이 참 좋다.

패브릭 위에 식빵과 크림치즈/잼을 놓고, 커피에는 동그라미 왕얼음을 퐁당 빠뜨린다.

동그라미 왕얼음이 뜨거운 커피랑 닿아서 내는 작은 균열의 소리가 참 좋다.


일주일 내내 켜지 않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오늘의 아침에 어울리는 곡을 고를 때까지 빵을 먹을 수 없다. 딱 좋은-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내 맘대로 정한 Lazy Sunday Moring Breakfast 식사 시작! '잘 먹겠습니다-' 일요일 오전의 식사 때는 휴대폰을 만지지 않는다.

노래에 맞춰 발을 까닥까닥 거리며 바삭바삭한 빵을 베어 물 때 왠지 리드미컬한 그 순간이 참 좋다.

 


평소라면 그대로 개수대에 쌓아두겠지만, 어허-! 오늘은 일요일 오전이다.

이미 준비되어있는 설거지 거리와 함께 뽀득뽀득 설거지를 하고, 행주로 물기까지 싹 닦아낸다.

오늘은 특별하게 클리너로 인덕션 위의 온갖 자국들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기특한 것. 하루 만에 지저분해지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반짝반짝한 나의 작은 주방이 참 좋다.


다음은 빨래, 쌓인 빨랫감을 고른다. 이건 수요일에 입은 블라우스, 이건 금요일에 입은 원피스.

하얀 옷은 다음에 빨기로 하고 색이 있는 옷만 골라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빨래가 돌아갈 동안 일주일 간 행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준 빨랫대의 옷가지와 수건을 갠다.

보송하게 마른 수건을 켜켜이 쌓아 팔과 턱 사이에 끼고 욕실로 가져가는 그 몇 걸음이 좋다.


띠리링-하고 쾌속 빨래가 끝나고 세탁기 문을 열 때 퍼지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좋다.

잠깐 비어져있던 빨랫대를 다시 채우면서,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널어놓지 말아야지 라고

지키지 못할 줄 알면서도 늘 하는 다짐이 재미있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내가 좋다.



마지막 한 가지는 나의 공간을 쓸고 닦는 것.

하루를 살아내려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한 젊은 여자가 어지럽혀놓은 화장대를 정리한다.

마구 올려놓은 귀걸이를 짝을 맞춰 액세서리 보관함에 끼워 넣을 때

지난 일주일이 짝 맞춰 착착 정리되는 기분이 참 좋다.

긴 머리의 여자가 일주일 간 흘려놓은 1인분의 머리카락을 정전기 포로 쓸어낸다.

한 줌이나 빠진 시간을 돌돌 싸서 휴지통에 집어넣고 나서 뒤돌아보면

한눈에 구석구석이 다 들어오는 7평의 공간에 한 톨의 거슬림도 없는 것이 좋다.

음 오늘은 쓸기만 해야겠다. 닦는 건 다음에.


시원한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괜히 캬- 소리를 내어본다.

반려 나무 주목이에게도 자랄 수 있는, 일주일 어치의 시원한 물을 부어준다.

목이 말랐던 나의 나무가 물을 마실 때 내는 뽀글뽀글 기포 터지는 소리가 참 좋다.


11:20 10월 6일 일요일

자- 이제 그만. 더 이상의 부지런함은 되었다.



노트북을 앞에 앉으니 깔끔해진 바닥, 정돈된 화장대와 새로운 빨래가 널린 빨랫대가 보인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니 채워진 수건함과 자국 없는 주방까지 한눈에 보인다.

한눈에 들어오는 나의 작은, 소중한 공간. 부지런을 떤 일요일에는 깨끗하기까지 한 어여쁜 나의 공간.


게으른 일요일 오전에 Lazy Sunday Morning을 들으며 부지런 떠는 걸 좋아한다.

딱 일주일 어치의 부지런을 떨고 나면 게으른 일요일 오전에만 걸 수 있는 마법, 그 마법이 걸려있다.

새로운 일주일을 살아낼 힘이 불끈불끈 생긴다.

으아- 정말이지, 분주하게 매일을 시작하고

또 다시 이 공간을 열심히 어지럽힐 힘이 생긴다.


밤이 되면 조금 우울해지겠지만 어쩌겠는가.

새로운 일주일을 살아낼 나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치얼스-!



<Lazy Sunday Morning>_클래지콰이 프로젝트

It's getting late on Sunday morning

I get up and see


Silly TV talking by itself in the living room
I slept on the sofa again
And don't remember the ending of
The late night movie
And my old lady she don't care,
As I look for food in the fridge


Well, this is life
Well, this is my life
Well, this is life
To plan a weekend with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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