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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05. 2019

전 90년대 생이고요. 인생 드라마를 만났습니다.

매우 주관적인 <멜로가체질> 리뷰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있자니, 내 인생의 곳곳에서 '안녕 나 기억하지~'하고 손 흔드는 드라마들이 주마등처럼 스르륵 스쳐 지나간다.

드문드문 몇 개의 좋은 기억만 남은 어린이 시절, 방 한 개에서 온 가족이 함께 누워자던 사택에서

지금의 나만큼 젊은 아빠 엄마와 함께 졸음을 억지로 참아가며 봤던 가을동화부터

대학생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베프와 소주를 각 2병씩 마시고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진

자취방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보았던 질투의 화신까지

당시 술만 마셨다 하면 온 동네를 뒤져서라도 꼭 사 먹고는 했던, GS25 편의점의 우유 호빵처럼

뜨끈뜨끈하고 부드러운, 달콤한 구석이 있는 기억들.


뒤가 뭉툭하게 튀어나와 아빠만 옮길 수 있었던 텔레비전에서, 거실 한 면을 크게 차지해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 큰 자랑거리였던 평면 TV, 그리고 20살부터는 1박에 겨우 2만 원이던 유럽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대학 기숙사에서, 자취방에서, 대출을 받아 마련한 첫 오피스텔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언제나 어떻게든 드라마를 보는 나는, 드라마 러버다.

그런 내가 감히 말하건대, 26년 인생에서 인생 드라마를 만났다. <멜로가 체질>


(출처: JTBC 홈페이지)


싫어하는 것이 오조오억 개이고, 좋아하는 것이 육조칠억 개인 내가

이 드라마를 "내 인생 드라마라고!"라고 말해버리고는 스스로 얼마나 놀랐는지.

이 드라마를 뒤늦게 보기 시작했다고 화두를 던지는 지인을 보고는

'아, 내가 훨씬 먼저 봤는데. 왜 이제 와서 화제가 되는 거지'라는 일종의 홍대 병도 아닌 것이

홍대 병 같기도 한 것이 찾아온 나를 발견하고는 또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왜 때문에 이 드라마를 인생 드라마라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도,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사랑스러움이 경쾌한 이 드라마가 끝난 지 일주일,

이번 주부터 이 드라마를 만날 수 없음에 벌써 심심해진 내가 내린 결론은

<멜로가 체질>이 보여준 "같음에서 오는 공감"과 "다름에서 오는 다정함"에 있다.



같음에서 오는 공감

"시선은 어딘가에 끝없이 머물렀다.

시선이 머무는 구석구석마다 작지만,

확고한 행복들이 손을 들었다.

나는 종종 가슴을 탕탕 쳤다.

너무 행복하여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요일의 여행>_김민철 작가 속 좋아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에 아주 분명하게 존재하는 순간순간이 <멜로가 체질> 속에 있었다.

많은 장면들이 내 가슴을 탕탕 칠만큼 확고하게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오르게 했고,

내 기억 속 장면의 등장인물들에게, 이 드라마의 장면을 공유하고 싶었다.


진주와 범수가 밤새 술을 퍼마시는 장면에서는 대학시절 화려한 음주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카톡 했다.

-과일맛 소주 맛 별로 한 병씩 시켜서 무슨 컬렉션처럼 줄 세워 놓은 거 보고 사람들이 기겁했는데 그치?

-그래, 우린 박애주의자라서 그래. 소주의 맛과 주종을 차별하면 안 되지. 그럼 그럼.

-우리 각자 앞에 소주 한 병씩 두고 마시는 거보고 아무도 우리 테이블 안 왔잖아. 내 연애의 종말은 너네 덕분이라고^.^

-야, 우리는 잘못이 없어. 술을 만든 게 문제야.

-뭐래, 술이 무슨 문제야. 술이 우리의 원수는 맞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어.


진주, 은정, 한주가 클럽 나들이 간 밤에는 클럽의 첫 경험을 함께 했던 고향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카톡 했다.

-역시 클럽 갔다 와서는 국밥이지. 유산소 운동한 뒤에는 무조건 탄수화물이야.

-거기에 소주 한 병 나눠먹으면 끝나는 거 알지. 힘들어서 또 많이는 못 마셔요.

-클럽 갔다가 허기져서 국밥 먹고, 국밥 먹으니까 힘나서 갑자기 노래방 간 거 기억하냐.

-아 그때 노래방에서 나와서 신촌에서 첫 차 타고 기숙사 가는 길에 기절했잖아.

-맞아 맞아 내선순환 타고 빙빙 돌다가 눈뜨니까 건대더라. 그때 진짜 미쳐가지고 놀았는데.


<멜로가 체질>을 본 밤이면 나에게도 있는 그 장면 속 등장인물을 소환하고,

카톡 방에 내가 공유한 클립을 보며 모두 함께 그때의 기억을 소환했다.

많이 무모했고 조금 창피했으며 많이 해맑고 조금 아팠던, 당시의 우리들.

'진짜 미쳐가지고, 많이 행복했는데, 참 재미있었는데'로 끝나는 대화들.


(출처: JTBC 홈페이지)


인물들의 직업과 생활 같은 것에 대한 공감은 차치하고,

한 회, 한 회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대사 속에서 많은 대사들이 내 뼈를 때려서 아팠고

그 대사로 뼈를 후려치고 싶은 누군가가 생각났다.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장면들이 내 기억의 장면이라서 좋았고

그래서 내 기억 속 장면의 등장인물들에게, 이 드라마의 장면을 공유하고 싶었다.


어여쁜 기억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과, 누가 함부로 스크래치 낼까 혼자서만 품고 꺼내보고 싶은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두 새어 나와, 어떤 날에는 '내 인생 드라마라고!' 소리치며 시청을 강요하기도,

또 어떤 날에는 '아니 왜 이제 와서 난리라고 떠들어!'하고 입을 삐쭉였는지도 모르겠다.

범수의 말처럼,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7살 난 아이처럼 마음이 이러쿵저러쿵 안달 나기 마련이니까.



다름에서 오는 다정함

클립에 달린 댓글을 보다가 '모든 등장인물을 빛나게 조명하는 드라마'라는 내용에 너무 공감이 가서 하트를 눌러버렸다. 그렇지, 주인공의 친구가 다큐를 찍고 있는 어느 여배우의 매니저가 '민준'이고

주인공의 친구와 함께 일하는 어느 후배의 고슴도치 여자 친구가 '하윤'이라서 좋았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을 내가 외우고 있어서, 이 인물들을 마치 내 친구인양 소개할 수 있어서, 그래서 좋았다.


<멜로가 체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어떤 끝과 어떤 시작점에 서있었다.

26년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무엇인가를 끝내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그래서 늘 반만 한다. 끝내는 건 어렵기에.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건 그보다 더 힘든 일이다.

90년대 생인 우리에겐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쉽게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래서 끝과 시작에 서있는, 아주 다른 매력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가 좋았다.


(출처: JTBC 홈페이지)



연인과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재훈을 보면서 연애가 하고 싶어 졌다는 한주에게서, 다른 설렘의 형태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지 2년 만에 나 힘들다고, 안아달라고 하는 은정에게서, 다른 슬픔의 형태를 보고

저마다의 사랑의 형태, 설렘의 형태, 슬픔의 형태, 우울의 형태가 있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들이 함께 구성한, 다른 가족의 형태를 보고 꽤 큰 위안을 받았다.


효봉이가 동성인 문수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국이를 기르는 게 엄마 아빠가 아닌 엄마의 친구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이라서, 그냥 그대로 다 괜찮은 게 사랑이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래서 보일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무언가도 그대로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결핍되어 있는, 그래서 누군가는 모자라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그대로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딱히 정의 내리지 않은 어떤 누군가에게라도

"행복하세요. 어떤 형태로든!"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이 글을 <멜로가 체질> 관련자분께서 보실 수도 있으니 (흠흠...)

덧붙이는 시청률에 대한 의견.

1% 대라는 것에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나를 포함하여 <멜로가 체질>을 진짜 진짜 좋았다고 평가한

내 주변의 모든 2030 여성은 노트북이나 모바일로 드라마를 시청한다.

시청률은 대중성의 잣대일 뿐 완성도와는 그리 상관이 없으니, 대중성은 낮지만 완성도는 높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방송 시간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시청자만이 대중은 아니니까.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 <멜로가 체질>은 내 ‘인생 드라마' 타이틀을 꽤 오래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무척이나 주관적인 리뷰- ;

일상의 소소한 단면 단면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담아내는 드라마였다.

많이 가졌지만 동시에 많은 걸 가지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의 공감을 얻어낸 드라마였다.

저마다의 형태가 있음을 인정해주고, 그냥 그대로 그렇다고 담담하고 또 경쾌하게 말해주는 드라마였다.

그래서 고마웠다. 재미있었다. 아쉽지만, 안녕-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_장범준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스쳐지나간건가? 뒤돌아보지만
그냥 사람들만 보이는거야


어떤 계절이 너를 우연히라도 너를 마주치게 할까?

난 이대로 아쉬워하다 너를
바라만 보던 너를 기다리면서
아무말 못하고 그리워만 할까


걷다가 보면 항상 이렇게 너를
바라만 보던 너를 생각한다고 말할까?
지금 집앞에 기다리고 때론 지나치고 다시 기다리는
꽃이 피는 거리에 보고파라 이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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