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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03. 2019

필요할 때 '나를' 꺼내 쓰기로 합니다.

나 사람의 배터리 효율성 높이기

아 뭐야, 비 온다며...

무조건적으로 해가 쨍쨍한 날을 좋아하는 내가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게 될 줄이야.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월화수요일 내내 업무 효율은 폭망이고,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의욕이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로 땅을 파고 들어갔다.

퇴근하고 반려 나무에 물을 주고, 운동을 가고, 빨래도 돌렸지만 그것으로 그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글도 쓸 수 없었다.

도무지 내가 on 되지 않는 기분. 의욕도 생산성도 즐거움도 없었다.


소파에 기대어 멍 때리거나, 이른 시간 침대에 누워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받은 영상을 보며

무의미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가 문득문득

'지금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내일의 업무는, 가까운 미래의 이직은...'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서, 마음껏 게으르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근데 왜때문에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마침 목요일이 개천절이라 너무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기상 예보는 더-더욱 다행이었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빨간 날이라니, 이건 진짜 최고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 어떤 계획도 없이 나를 그냥 꺼놔야지.

몸도 마음도 뇌도 off 시켜놓고 충전기를 꽂아놓으면, 더 빨리 충전될 거야.


그리하여, 어두컴컴한 하늘에 오전 늦게 일어나서

두세 시간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가, 오후가 시작되고서야 침대에서 기어 나와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배부른 상태에 조명 하나 켜지 않은 방에서 낮잠을 자고

또 저녁을 대충 해결하고, 다시 누워 영화나 한편 보고 하루를 종료하려던 계획.


이족 보행을 포기하려던,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눈을 뜨니 겨우 오전 9시 2분.

이미 저 먼 동해 바다 어디로 떠난 태풍 덕분에

어두컴컴한 하늘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는커녕, 청량하게 파아란 하늘이 아침 일찍 잠을 깨웠다.

아 뭐야, 비 온다며...


억지로 다시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영화를 보고, 짜탕면을 시켜먹고,

배부른 상태에 조명 하나 켜지 않은 방에서 낮잠을 자려고 누웠다. 여기까진 계획대로 오케이.

오케이-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그러나 날씨는 정말이지 좋았고, 내 방은 서남향이라 조명 없이도 충분히 밝고

틈 없이 내려놓은 블라인드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내가 정말 사랑하는 새파아란 하늘이라니. 약이 올랐다.

이러면, 낮잠을 잘 수가 없잖아...!


결국... 양치만 하고 슥슥 눈가를 닦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나왔다.

노트북, 이북리더기를 양손에 들고는 집 주변 카페라도 갈 심산이었다.

나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빨간 날을 기대하고 별다른 약속을 잡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

가까운 카페들은 모두 만석. 어쩔 수 없이 지하철 역 근처 가장 큰 스타벅스로 향했다.


집에서부터 역까지 나아가는 길, 골목골목을 지날 때마다 뜨거운 햇살에 조금 덥기도 하고, 그늘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상쾌하기도 하고

'의욕 없어! 재미없어!'를 온몸으로 외치던 월요일부터 세운 야무진 계획은 어디 가고

이렇게 또 나와서 복작복작한 스타벅스로 향하고 있는지.

화장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 느껴지는 민낯과 거울 한번 보지 않고 쓰고 나온 파란 모자,

쑥 입으면 그걸로 그만인 니트 롱 원피스, 슬리퍼 차림인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일주일의 날씨를 '예상'하는 일기 예보 따위, 하루치의 '계획' 따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퇴사와 이직에 대한 '걱정' 따위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떠났을 때 일기 예보가 100% 정확했던 적이 있었나

마음껏 게으르지 못했던 그 어떤 날의 걱정이 걱정함으로써 해결되었던 적이 있었나

그냥 하루하루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오늘은 스타벅스에 가서 나에게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사줘야겠다.

방금의 기분을 잊지 않도록 브런치에 글도 하나 써야지.

저녁은... 아 몰라 몰라 나중에 배고프면 생각할래!


결심이나 계획이야 바꾸면 그만, 일단 지금 하고 싶은 대로/하고 싶지 않은 대로 해보자.

나라는 사람의 배터리 효율성을 높여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땐,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무엇이라도 하고 싶을 땐, 더 확실하게 재미있어 버리기.


참- 아무것도 하지 않기 좋은 계절이다-

참- 뭐라도 하기 좋은 계절이다-


<고슴도치의 기도> - 우효


오늘도 고슴도치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는 빨리도 깨달아요

하지만 좋든 싫든

직면하는 법을 모르는 고슴도치죠


누가 가르쳐 줬는지 피해 가는 법만 배웠죠

그래서 아빤 말했죠

좋을 땐 기분을 조금만 묻어두자고

눈물이 떨어질 때 조금은 담아 두자고

필요할 때 꺼내 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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