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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25. 2019

이불을 바꾸었습니다.

모든 겨울 이불엔, 어떤 따뜻한 기억이 있을거에요.

출근길 블라우스의 하늘거림 사이로 꽤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살기 위해) 찾는 카페에서 고민의 여지없이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이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만, 지금부턴 따뜻한 라떼의 계절-


퇴근 후 운동을 하고 돌아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한 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장 속 어딘가 세탁소 어머님께서 예쁘게 꽁꽁 싸주신 극세사 이불을 찾아 꺼내는 것!


맨다리에 닿는 감촉이 까슬까슬한 여름용 시어서커 이불을 소파 위로 던져버리고, 세탁소 비닐을 막 벗겨낸 보송하고 보드라운 극세사 이불을 깔았다.


보기만 해도 따뜻해진 나의 공간, 나의 침대! 눈 내린 설원에 뛰어들어 팔다리로 나비 모양을 그리는 아이처럼, 이불 위로 폭- 뛰어들었다. 혼자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폭닥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에 괜스레 떠오른 이불에 대한 기억-


경상북도 어딘가, 마을의 이름부터 맑고 깨끗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가장 고우신 나의 외할머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귀한 막내딸인 엄마의 첫째 아가로 태어난 덕분에 외갓집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받은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거의 매주 주말 빠짐없이 외할머니 댁을 갔다. 그리고 외갓집에선 늘 외할머니 방에서 같이 잠을 잤다.


외풍이 세서 아가가 혹시 추울까, 문풍지를 바른 아주 오래된 방문 앞엔 외할아버지. 그 옆엔 외할머니. 그리고 가장 안쪽, 세상으로부터, 찬 바람으로부터, 가혹한 계절로부터 안전한 나의 자리가 바로 거기 있었다.


마당을 건너가야 바깥에 위치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나만을 위한 옥색 요강을 외할아버지께서 깨끗하게 씻어 내 머리맡에 놓아주시면, 잘 준비 끝-


불을 끄고 나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고요한 어둠 속에서, 외할머니의 손은 늘 나의 가슴께를 몇 번 토닥이며 이불이 나의 턱 밑까지 잘 덮여있는지를 확인하셨다. 자수가 화려하고 무거워서 어린 몸이 이불에 파묻일 것 같은 두터운 솜이불을 말이다.

“이불 발로 차지 말고, 폭 잘 덮고 잘 자라. 내 새끼”


이때 한 가지, 오랫동안 나는 몰랐던 문제.

대부분의 시골집이 그렇듯 아궁이에 가장 가까운, 그래서 가장 따뜻한 부분인 아랫목이 나의 자리였다는 것. 외할아버지께서 손주를 위해 그동안 아껴온 땔감을 아주 잔뜩 아궁이에 넣어주신 덕분에, 새벽이 되면 여지없이 등과 엉덩이가 뜨거워졌다.

열기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한 뒤척임이 끝나면 벌어져 있는 신기한 일. 턱 밑까지 덮여있던 두꺼운 이불과 작은 내 몸의 위치가 딱- 바뀌어 있었다.


시골집 작은방 할아버지와 할머니 옆에 찾아와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나 때문에, 외할머니께서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것은. 그때보다 키가 세 뼘은 더 자란 뒤 알게 되었다.

내가 이불을 잘 덮고 있는지, 또 모조리 깔고 자지는 않는지,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 여린 살이 상처입지는 않는지 살펴보느라, 발로 찬 이불을 가슴 위로 끌어올려 몇 번이고 토닥토닥하느라, 선 잠을 주무셨던 할머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외할머니.


방금 꺼낸 극세사 이불을 턱 밑까지 덮고 손 끝으로 천천히 그 보드라움을 느끼고 있자니, 그때의 무거운 솜이불과 할머니의 흙냄새 나는 손, 세상에서 제일 폭닥한 토닥거림이 생각났다.


지금은 자정이 되기 8분 전, 에라이 너무 늦었다.

내일은 할머니께 전화드려 자랑 아닌 자랑을 해야겠다. “할머니! 서울은 어제부터 새벽이 되면 엄청 쌀쌀하더라고요! 나 벌써 겨울 이불 꺼냈잖아~”라고 말이다.


산책 / 이한철
* 백예린 님의 커버곡을 좋아합니다.

한적한 밤 산책하다 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얼굴
반짝이는 별을 모아
그리는 그런 사람

대기는 차갑게 감싸고
생생하게 생각나는 그 때
안타까운 빛나던 시절

보고 싶어라 오늘도 그 사람을
떠올리려 산책을 하네

따뜻한 손 그리고 그 감촉
내가 쏙 들어앉아 있던 그 눈동자
그 마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주던 그가 보고 싶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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