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지나가는 서울, 그 순간의 장면들
일상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삭막한 서울살이 중에서도 그 감상의 순간에는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하철이 없는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대입 수시 고사를 위해 상경해서야 난생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탔다. 어느 역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2호선과 다른 호선이 함께 있는 역에서 나 스스로 강렬한 이방인의 기분을 느낀 것과 어느 다정한 아주머니께서 '초록색'을 따라가라고 알려주신 것은 똑똑히 기억이 난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버스를 선호했다. 사람도 차도 사건사고도 많은 서울 시내에서 지하로 거침없이 달리는 지하철이 훨씬 빠르지만. 창 밖으로 광화문이며 서울역이며 랜드마크들을 확인하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적어도 땅 위를 달리는 버스가 어쩐지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지하철 역에 내린 무거운 발들을 동네 이곳저곳으로 실어주는 마을버스 말고는 버스를 거의 타지 않는다. 대신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마주친 이방인들에게 자신 있게 길을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서울에서 20대를 보내며 지하철을 타고 참 많은 곳을 다닌 덕분이다. 땅 아래로 부지런히 쏘다니며 서울 땅 이곳저곳을 부지런히도 다녔다. 연예인을 만날 수 있다는 압구정부터, 망원동, 연남동, 서촌, 성수, 을지로까지, 나의 20대 초반을 서울 '무슨 무슨 길'의 흥망성쇠와 함께해서 진심으로 영광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지하철을 타고 다닌 대학 시절부터 서울 한편에 마련한 작은 나의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하기 위해 매일매일 2호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지르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구간은 지하철이 지하로 가지 않는 구간이다. 그중 지하철이 한강 위를 건너는 구간, 초록 나무 위를 지나는 구간, 그리고 여름 속을 달리는 구간을 가장 좋아한다.
2호선 합정역에서 당산역까지의 구간은 지하철이 한강 위를 건넌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 위를 건너는 기분은 언제나 특별하다. 날씨가 좋을 땐 한강 위 새파란 하늘과 선유도 공원에 자리를 잡고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땐 안개가 여의도 고층빌딩들을 무겁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밤에는 환한 국회의사당과 한강을 함께 건너가는 차들의 불빛을 감상할 수 있다. 날씨가 어떻든, 밤이든 낮이든 이 구간을 지날 땐 넋을 잃고 창 밖 풍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휴대폰으로 찰칵하고 창 밖의 풍경을 찍어, 그 순간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낸다. '지금 한강 위를 건너는 중. 오늘 하늘 색깔 완전 최고'같은 실없는 메시지와 함께. 서울 생활의 걱정, 고민은 잠시 넣어두고 오늘의 날씨와 오늘의 하늘색에 집중할 수 있는 구간. 그 순간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낼 용기를 주는 구간. 나처럼 휴대폰을 꺼내 창 밖의 풍경을 찍는 사람들의 저녁이 평온하기를 바라 줄 수 있는 구간. 지하철이 한강 위를 달리는 구간을 난 정말 좋아한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구간은 신도림에서 신대방까지 가는 구간이다. 대림역 가는 길엔 지하로 가지 않는 지하철의 높이와 딱 맞는 높이의 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다. 이때 책이나 휴대폰 화면에서 고개를 들어 빠르게 지나가는 초록의 행렬을 보는 것을 참 좋아한다. 앉아있는 나와 나무의 눈높이가 딱 맞아서 계절을 두 눈으로 듬뿍 느낄 수 있다. 대림역에서 잠깐 머문 열차가 다시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할 때, 지하철 바닥에 다시 빛이 드는 모습도 좋아한다. 3, 2, 1.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이제 빛이 샤라락 들어 바닥에 창문 모양의 그림자가 생기겠지 하는 찰나의 설렘이 좋다. 가끔 옆 레일의 다른 열차와 내가 탄 열차가 지나는 순간이 겹칠 때, 흔들림과 함께 이대로 열차가 땅으로 떨어져 버리면 어쩌지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는 나의 작은 가슴도 좋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출발해 신대방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나무들은 키가 좀 더 작다. 앉은 내 눈높이에서는 햇빛을 향해 팔을 뻗은 가장 위쪽의 잎들만 보이는데 그걸 보며 기특한 마음이 드는 게 좋다. 평일 아침 기계처럼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몸을 싫은 2호선, 이 구간을 지나는 동안에는 창 밖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는 내가 느껴진다. '살아진다'거나 '살아내는' 내가 아니라 '살고 있는' 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무 위를 달리는 지하철이 지나는 이 구간을 참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연인을 만나러 안양으로 가는 구간을 좋아한다. 1호선 급행을 타면 서울에서 안양까지 몇 정거장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창을 가득 채운 초록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긴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다.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안양으로 가는 길은 나무와 창이 아주 가깝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공간으로 존재한다면, 꼭 그 속을 달리는 기분이 바로 이럴 것이다. 지난번에는 우연히 그 구간을 지날 때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연인을 만나러 여름 속을 달려가는 이 지하철이 너무 사랑스러워 코 끝이 괜히 시큰해지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지하철을 타는 것도, 지하철을 타고 서울 곳곳을 여행하는 것도 어렵고 꺼려지는 지금. '나는 지하로 가지 않는 지하철에 올라타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을, 일상의 어떤 순간들을 관찰하는 걸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한강 위를 건너는 지하철, 나무 위를 지나는 지하철, 여름 속을 달리는 지하철. 내가 좋아하는 지하철과 구간들이다.
여러분은 어떤 지하철과 구간을 좋아하시는지? 혹은, 오늘의 어떤 순간을 좋아하시는지? 매일 무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실은 지하철이지만 아마도 분명 좋아하는 구간이 있을 거다. 어쩐지 누군가가 생각 나는 구간, 휴대폰을 집어넣고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게 되는 구간. 오늘 지하로 가지 않는 지하철을 타신다면 창 밖의 어떤 풍경을 관찰해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한 번쯤 빙긋 웃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