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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l 22. 2020

과일만 제철이 있나요?
사랑하는 제철의 일들.

이 계절에 무릇 해야 하는 일

샤워를 하고 나와 선풍기 앞에 앉아서 자두를 먹었다. 지난주 본가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몇 알 챙겨 넣어준 자두였다. '이것 좀 가져갈래?'라고 하면 '이것'이 뭐든 간에 두 손을 격하게 휘두르며 한사코 거절하는 나이지만, 자취를 하면 가장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이 제철 과일인지라 '아 알겠어. 그 대신 5개만 담아줘. 더 담지는 마.'라고 이상한 으름장을 놓으며 받아온 자두였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싸며 욕실에서 나올 땐 밤이 늦었으니 두 알만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무르니까 냉장고에 재어두지 말고 빨리 먹어'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 다섯 알을 모두 씻었다. 그 맑디 맑은 빨간색 과일을 두 손에 넣고 찬 물에 헹구고 나니 어쩐지 예쁘게 담아내고 싶어 야밤에 아끼는 접시도 꺼냈다.

유리 접시에 동그랗게 담은 자두 다섯 알을 자취방 바닥, 선풍기 앞에 앉아 와앙 와앙 베어 먹다 보니 과일에만 제철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맞은 시절이라는 뜻의 제철.

제철 과일, 제철의 소비, 제철의 인연, 제철의 행복 같은 단어가 마구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제철의 일을 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브런치 글 발행이 6월 초였으니 꼬박 한 달을 마냥 게으르게 살았다. 열심히 일 하지 않았고, 일기를 쓰지 않았고, 계획한 공부도 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지 않았고, 요리를 하지 않았고, 나를 가꾸지 않았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고,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게으름을 피워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 마냥 한 달을 보냈다. 그 지난 한 달간 내가 겨우 한 일을 나열해보자면,

우선, 계절이 오고 가는 길목에 늘 앓는 편도염을 잘 이겨냈다. 선풍기를 꺼내서 먼지를 깨끗이 씻었다.
봄에 새 잎이 돋아 화분이 작아진 반려 나무의 줄기를 정리해주었다. 방의 가구 배치를 바꿨다.
마음에 드는 여름 잠옷을 샀다. 냉장고에 캔맥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보충했다.
술집에선 소주 대신 생맥주와 청하를 마셨고, 걸을 수 있거나 어딘가에 앉을 수 있는 밤에는 언제나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공원에서 자전거나 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보면서 연인과 치맥도 했다.
10년 지기 친구들과 하늘은 파랗고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은 초록색인 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시티 팝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틀었고, 그러다 도쿄의 여름이 배경인 일본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도 했다.
정말 좋아하는 동그란 얼음 틀을 꺼내 늘 얼렸고, 커피와 위스키에 퐁당 빠트려 먹었다.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완독 했고, 여름에 늘 찾는 소설도 다시 꺼내 읽었다.

한 달 내 루틴을 잃고 게으르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적고 보자니 '여름이니까', '여름밤이잖아'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는 온갖 일들을 부지런히 한 것도 같다.



맞아, 나는 그런 사람이지. 그 계절이니까 무릇 해야 하는 일,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국내 최고 명문대에 진학할 것임을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담보한 19살의 나. 나는 수능을 제대로 망쳤고, 조금의 과장도 없이 정말이지 그 날 하루의 기억을 잃었고, 이대로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재수를 하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때 당시 이렇게 말하고 다녔던 걸 떠올려 보면 사실 나는 내 인생이 그대로 끝이 아니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잖아. 난 봄에 벚꽃 놀이 가고, 여름에는 물장구치러 가야 해. 가을에는 단풍 구경하고, 겨울에는 또 따뜻한데 반짝거리는 걸 쫓아다니겠지. 난 못해. 담보할 수 없는 일 년을 그냥 보내는 거 나는 못해."

이 거지 같은 겨울은 어쨌든 지나갈 것이고, 그런 다음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올 것이며, 그렇게 내 앞에는 무수히 많은 계절이 오고 갈 것임을 분명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제철의 일을 계속 좋아해야겠다. 알맞은 시절에 할 수 있는 알맞은 일들을 기꺼이 해야겠다. '봄이니까' 가야 하는 곳을 가고, '여름이니까' 깨어있는 밤을 보내며 밤새 깔깔대고, '가을이니까' 사야 하는 것을 사고 , '겨울이니까' 생각나는 좋은 사람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우선은 내일 자두를 더 사와야지! 선풍기 앞에 앉아 질리도록 이 예쁜 과일을 먹어야지. 그리고 이 여름을 더욱 게으르게, 더욱 부지런하게 보내야겠다.

아 참- 오늘 외국에 있는 대학 동기 언니에게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고, '행복한 날도 있고, 그냥 그런 날도 있고, 별로인 날도 있는 거지. 근데 오늘은 좋은 날이야'라고 답장했다. 고민 없이 그런 말을 적어 보낼 수 있는 오늘의 내가 꽤 괜찮게 느껴졌다. 서울살이는 외롭고 직장 생활은 그저 그렇고 하고 싶은걸 마음껏 할 수 없는 시대가 힘들지만, 오늘 하루를 싹 씻어 보내고 선풍기 앞에 앉아 먹는 자두는 달고 시원하다.

그럼 된 거 아니겠어? 그래, 아주 달고 시원한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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