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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로비 Nov 01. 2020

9. 음악과의 연결고리

그리하여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엮이게 될 10편의 글을 네 달에 걸쳐 연재합니다.




얼마 전 부모님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내게 “그래서... 넌 도대체 뭐냐..?” 라고 물어오셨다. 이 한 문장만 떼어놓고 본다면 이게 당최 무슨 질문인가 싶겠지만, 종잡을 수 없는 아들의 진로가 도대체 어느 쪽으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에서 물으신 말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과학자를 꿈꿨던 이공계 꿈나무가 갑자기 음악을 한다며 뛰쳐나가더니 어느새 디자인 학교에 입학해있었고 졸업을 앞둔 지금은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아 오신 부모님으로선, 본인들 사이에서 나온 아이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여기시기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보아도 이제껏 걸어온 길은 이곳저곳 중구난방에 일관성 없는 행보로 비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주체적으로 진로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매번 되놰왔던 나와의 약속이자 바람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음악과의 연결 고리를 놓지 말자는 것이다.


그랬던 나의 관심이 현재진행형으로 모이고 있는 분야가 '앨범 커버'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왜 굳이 '앨범 커버'일까? 심지어, 디자이너가 되어 직접 그 분야에 몸담을 수도 있는 길을 놔두고 왜 그것에 대해 파헤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에 더욱 몰두하게 된 것일까? 물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따르듯, 논리적으로 일의 순서를 따져 들어간다면 남에게 설명하지 못할 일은 없다. 다만 그것이 이성의 영역을 넘어 스스로 마음속 깊이 납득시킬 만큼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질문은 작업을 진행하는 내내 혓바닥 끝에 난 작은 염증처럼 계속해서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지막 글의 얼개를 구상하던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전체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간 적었던 글을 훑어보던 차에 문득, 앨범 커버가 겪어온 역사의 흐름이 내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짧지 않은 시간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하든 음악과의 연결 고리를 놓지 말자'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은 여러 복합적인 문제로 음악 자체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꿈을 포기하면서 가지게 된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맡아왔던 다양한 작업들, 이를테면 아마추어 음악가들과 협업하여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다든지,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음악 관련 행사에 참여했던 것, 혹은 지인들과 합심하여 만든 밴드에 매니저로서 힘을 보탰던 일 등은 전부 음악과의 연결 고리를 조금 더 넓고 끈끈하게 지켜가고자 했던 바람에서 이어진 것들이다. 동시에 이 모든 작업들은 음악이라는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맞추어가는 과정이었다.


한편, 앨범 커버는 음악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분야다. 탄생부터가 음악을 위한 포장지의 개념으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음악을 조금 더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진 채 발전해왔다. 저장매체가 진화함에 따라 음악을 담는 방법 또한 조금 더 작게, 조금 더 간편하게 변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앨범 커버의 구성과 형태도 빨라진 보폭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디지털 시장으로 세상의 모든 이목이 쏠렸던 기술 발전의 과도기를 거치며 잠시 그 위상을 잃기도 했지만 결국 재정비에 성공하며 다시금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심지어 과정 중심으로 전환 중인 현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에 따라 어느덧 앨범 커버 또한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담아낼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독립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듯, 본격적으로 이 분야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1939년부터 지금까지 70여 년의 시간 동안 앨범 커버는 수많은 변곡점을 거쳐왔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이러나저러나 앨범커버는 음악의 얼굴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창작자와 소비자, 음악가와 청자의 욕망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며, 그리고 쉴 새 없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어떻게든 음악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고 있는 앨범 커버의 변천사는 내가 거쳐온 짧지 않은 시간들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힘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이 분야에 계속해서 마음이 갔던 이유는 그 자체로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이 아닐까? 물론 위에서 이것을 '어렴풋한 대답'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이 대답 하나만으로 나를 완벽히 규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 역사를 추적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나의 시간들 또한 덩달아 정리되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루어 짐작해볼 만한 것이 하나 있다. 앞으로의 앨범 커버가 그 연결 고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어 나갈지에 대해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한 단서 또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따지고 보면, 앨범 커버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그 시대와 사회를 알아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바라건대, 다가올 음악 시장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과정을 통해 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앨범 커버에게도 “도대체 넌 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올 대답은, 더는 하나로 특정지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원화된 ‘동시대’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세분화되면서 그 음악을 담아내는 방식 또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게 된 탓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게 쪼개지고 있는 흐름 속에서도 주류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스트리밍과 추천 시스템, 플레이리스트 등의 방식은 편의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지고 왔지만, 안타깝게도, 음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앨범 커버가 끼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갈수록 약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추천곡 시스템이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어떤 곡을 새로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검색을 해보지 않는 이상 그 곡의 앨범 커버가 머릿속에 각인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 그 음악은 여전히 '목록' 속에 포함된 얼굴 없는 사운드일 뿐이다.


이것은 ‘주류’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쪽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참고로 나의 경우, 취향이 너무 확고한 탓인지 추천 시스템의 효과를 크게 체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평소 들을 음악을 직접 골라 리스트를 짜거나 한 곡씩, 혹은 앨범 단위로 음악을 감상하기 때문에 매일 수 없이 쏟아지는 신곡들 사이에서 취향에 맞는 음악을 만나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만큼이나 막막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어주는 것은 결국 그것이 ‘누구’의 음악이냐는 것이다. 음악가가 ‘누구’인지에 따른 선택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적다. 이 과정에서 앨범 커버는 어떠한 음악이 선택당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앨범 커버가 '음악의 얼굴'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은 일단 그 음악이 온전히 귀에 들어온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제야 음악은 비로소 이미지로서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클릭을 유도하는 핵심정보가 앨범 커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있지 않은 이상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여전히, 정보란에 별도로 적힌 '음악가 명'이다.


심지어 더는 유의미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의미로 앨범 커버를 적용하고 있는 분위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앨범 커버'라는 분야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보편적인 흐름에 의한 변화이든, 그 반대급부에 따른 변화이든 간에, 홍보와 정보 전달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마저도 상실한 앨범 커버의 근황은 정보과다라는 시대 분위기와 그로 인해 탄생한 효율성 중심의 산업이 무너지지 않는 한 큰 이변 없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말 그대로 앨범 커버는 쓸모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 암울한 생각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근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 생각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어진 몇 편의 글에서 어떤 것이 쓸모없어짐에 따라 그 쓸모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 몇 가지의 사례를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이 맥락은 앨범 커버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유효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홍보와 정보 전달, 판촉이라는 기능 중심의 쓸모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앞 장에서 서술한 케이팝 시장의 최신 흐름 또한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은 앨범 커버라는 분야가 실용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이 대상에 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조금은 거창해 보이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탈도구화를 통해 부수적인 의무에서 해방된 앨범 커버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음악의 얼굴'로 발돋움하고 있는 셈이다. 더는 음악가가 누구인지, 앨범명이 무엇인지 같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강박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는 환경이 도래함에 따라 창작자는 앨범 커버라는 매체를 통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음악의 시각화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나의 경우처럼 '누구'의 음악인지를 중요시하는 부류의 취향, 상징적인 의미를 강화해나가는 '앨범'이라는 추상적 단위의 진화, 그리고 감성의 영역을 극대화하고 있는 새로운 음반 시장의 등장 등 다양한 요인과 함께 시너지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결과물을 통해 작가성을 발현하는 과정에서 간섭으로 작용할 수 있는 외부의 수많은 요인이 흐릿해진다면 음악가 개인이 시각 요소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혹은 관여해야 하는 영역 또한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시각이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야기의 대상을 '앨범 커버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시각 요소'로 넓혀본다면 오히려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앨범 커버만으로 한정 지어야 한다면 결국 디자인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장난 같지만, 어떤 것이 쓸모없어졌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단어 그대로 그것이 더는 쓸모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디자인의 간소화라는 커다란 흐름을 역행하는 것은 갈수록 힘겨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충하는 양상이야말로 더는 하나로 특정짓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원화된 동시대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대에 어떤 것을 명확히 규정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의 다양한 면면이 모두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극화되어가는 시장은 지금껏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 의심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이 책의 초입부터 쉬지 않고 다루어 온 앨범 커버라는 대상은 결국 관습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편에서 여전히 그 존재감을 빛내며 본질적인 의미의 '음악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은 관습 너머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상상해보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아니, 이제야말로 앨범 커버를 두고 '음악의 얼굴'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앨범 커버는 음악의 얼굴이 되어준다.' 이것이 '도대체 넌 뭐냐' 라는 질문에 대한 앨범 커버의 대답이다. 이 책의 초입에도 적혀있는 문장이지만 이제 와서 보니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그래서 도대체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께 한 마디로 딱 잘라 설명하지 못했던 그때처럼 여전히 반복되는 고민과 의심이 속 시원한 대답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 고민과 의심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오늘도 같은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뚜렷한 확신을 얻는다. 비로소 스스로 빛나게 될 앨범 커버처럼, 음악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은 채 어떠한 지점에 무사히 도착해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하여 그곳의 음악은 낯설지 몰라도 그곳의 내가 하고 있을 고민은 낯설지 않기를, 그렇게 바라본다. 



글 월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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