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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로비 Nov 01. 2020

8. 과정으로서의 콘텐츠

확장을 위한 퍼즐 조각

한 권의 책으로 엮이게 될 10편의 글을 네 달에 걸쳐 연재합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케이팝이라는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처음 아이돌 그룹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군 복무 시절로부터 3년이 흐른 2019년의 일이다. 단순히 특정 그룹을 향한 것으로 그쳤던 관심이 케이팝이라는 전반적인 현상 자체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 덕분이었다. 힙합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김봉현 작가님의 주도로 모여 지금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음악 저널리즘 팀 ‘매디(MAEDI)’에 참여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그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첫 도전과제가 바로 방탄소년단(이하 BTS)이었다.



그래미 베스트 레코드 피키지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BTS의 《Love Yourself》시리즈


음악과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첫 모임부터 함께 했지만, 그중에서도 음악과 디자인의 만남에 관한 꾸준한 애정을 강점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케이팝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아니, 가져야만 했던 필수 불가결한 영역이었다. 시각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유행을 선도하는 케이팝의 특성상, 그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에도 적합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당시 가장 화제였던 BTS는 마치 케이팝 입문자를 위해 준비된 신고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인기와 음악적 성과만을 보고 덥석 선택해버린 것은 아니다. 세상이 주목한 것은 BTS의 음악뿐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감싸고 있는 디자인이기도 했다. 정규 3집 앨범이 2019년 제61회 그래미 어워드의 베스트 레코딩 패키지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실제로 가장 동시대적인 요소들이 가득 담겨 있었던 덕분에 시기적절한 입문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 전에, 디자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키워드가 몇 개 있다. 최근 음악 시장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세계관’, ‘팬덤’, ‘네트워크’, ‘확장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것인지까지 내다보아야 하는 시대에, 이 같은 키워드는 콘텐츠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창작자의 역할은 팬들이 자유롭게 살을 붙여나갈 수 있는 단서와 그것을 위한 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렇게 창작자가 깔아놓은 판, 즉 세계관 속에서 서로 다른 포맷으로 다양하게 퍼져있는 단서들을 연결하고 그사이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은 다름 아닌 팬들의 몫이다. 참고로 이러한 방식은 주로 걸그룹보다 보이그룹 사이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응집력이 강한 여성 팬덤의 힘이 작용한 현상이며, 세계관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팬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최종장에서 비로소 하나로 합쳐지는《Love Yourself》시리즈의 모든 앨범들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된 BTS의 정규 3집 《Love Yourself》는 이런 맥락 속에서 기승전결의 음악적 구성을 디자인에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뮤직비디오로 공개된 ‘'기' 파트를 제외하고, 서로 다른 디자인을 적용하여 총 1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발표된 나머지 ‘승’, ‘전’, ‘결’ 파트의 앨범 커버에는 ‘사랑의 설렘’으로 시작해 ‘이별의 아픔’을 지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스토리텔링의 과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앨범을 모으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그림이 완성되는데, 이로 인해 각각의 앨범 커버는 거대한 세계관 속 이정표의 역할을 겸하게 된다. 최종 장을 통해 이들의 성장 서사가 완성된다는 맥락을 활동 초기부터 함께 그려볼 수 있도록 꾸준히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탄탄한 세계관으로 스토리텔링을 이어가는 엑소의 정규앨범들 (좌측상단부터 순서대로 1집~6집)


그런데 이러한 전략, 그러니까 세계관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콘텐츠를 확장해가는 방식은 비단 BTS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나의 경우 이 분야로의 입문을 BTS와 함께했기 때문에 조금 더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미 많은 곳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자사의 아이돌 그룹을 키워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 흐름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불리는 그룹은 SM 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엑소(EXO)다. 엑소는 외행성을 뜻하는 'exoplanet'에서 모티브를 얻은 그룹명답게, '미지의 세계에서 온 새로운 스타'라는 의미를 담아 멤버별 초능력을 설정하며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소하면서도 파격적인 컨셉으로 인해 데뷔 초 많은 화제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SM의 마케팅은 다양한 2차 창작물과 굿즈 시장으로 확장되며 시장 자체의 판도를 바꾸어놓는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BTS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행보가 단편적인 활동으로 끝나지 않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굵직한 서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와 관련된 ‘떡밥’들 덕분이기도 하다. ‘기억과 초능력을 잃고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들이 힘을 되찾아 적을 물리친다’라는 엑소의 스토리라인은 여러 앨범에 걸쳐 진행 중이다. 게다가 이와 관련된 무수한 복선들이 영상과 가사, 그리고 앨범 커버 등으로까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는 덕분에 팬들은 그것들을 회수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창작자가 제공한 세계관에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메시지를 담으려는 아이돌 그룹의 앨범 커버들. 전부 굵직굵직한 소속사의 작품이다. (순서대로 NCT, 트레져, 피원하모니)


이외에도, ‘무한확장’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를 소화하고 있는 SM의 ‘NCT’, 나만의 보물을 찾아간다는 컨셉의 YG 엔터테인먼트의 ‘트레져’, 인류 구원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등장한 FNC엔터테인먼트의 ‘피원하모니’ 등, 세계관을 통한 접근법은 이미 케이팝의 통과의례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맥락을 장기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디자인에까지 녹여낸 사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보다 많지 않은 사례’들은 전부 우리가 흔히 대기업이라고 부르는 SM과 빅히트 같은 대기업 소속사들의 아이돌이다. 회사의 자본이나 팬덤의 규모에 따라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디자인, 이를테면 멤버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최대한 부각하는 방식이 여전히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대기업의 입장에서도 디자인과의 연계를 통한 세계관의 확장은 어느 정도의 도전이 가미되어 있는 시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엑소와 BTS가 일본 시장을 위해 발표한 앨범들. 국내 앨범들과 그 방향성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가로로 한 줄씩 엑소와 BTS)


이것은 앞서 언급한 BTS와 엑소마저도 해외를 겨냥한 앨범에서는 기존의 디자인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시장에서 우선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인지도이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먼저 일구는 것과 같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떤 그룹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오른 후에야 시도하게 되는 ‘다음 단계’의 영역에 ‘세계관과 함께 맞물리는 앨범커버’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 사례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음악 시장 내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이제 막 효과가 입증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만큼, 새로운 앨범 커버 형식을 하나의 맥락으로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새로운 범주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지금까지 앨범 커버라는 분야가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홍보와 판촉이라는 기본 골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앨범 커버를 포함한 많은 시각 요소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지금부터 언급할 앨범 커버들은 더는 홍보라는 일차적 기능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 전과 다른 용도를 위해 추가된 전에 없던 역할은 앨범 커버를 거대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퍼즐 조각으로서 기능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예시로 들었던 BTS의 경우처럼 중심 스토리텔링과 동일한 맥락을 통해 전체 서사를 보완해주면서도, 이미 그것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독립성 또한 갖추게 되었다.


엑소의 정규 6집 앨범 《OBSESSION》


글 도입부에서 짚고 넘어왔던 몇 가지 키워드와 함께 바라본다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엑소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정규 6집 앨범 《OBSESSION》은 음악이 발표되기 전부터 앨범 커버 한 장으로 이미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팬들은 교차한 깃발의 색과 형태, 구도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다양한 해석을 주고받았고, 결과적으로 음악이라는 본체가 담고 있는 원래의 의미가 몇 배로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앨범 커버는 단순히 음악을 대표하는 이미지 이상의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음악이 없어도 충분히 독립된 콘텐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앨범 커버만 이런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팬들은 티져 영상과 뮤직비디오, 가사와 안무 등등 모든 요소를 한데 모아 비로소 하나의 퍼즐을 완성한다. 덕분에 그 퍼즐은 창작자의 최초 의도를 아득히 넘어서 훨씬 깊고 넓은 의미를 품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창작자의 개입이야말로 이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조력자라는 사실이다.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이 더해져 그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앨범 커버의 메시지 전개 방식은 예술(이 글에선 순수예술(Fine Art)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의 문법을 차용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이 선을 넘을 정도로 다양해지지는 않도록 적당한 단서를 제공하는 창작자의 태도에 있다. 아리송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며 제공되는 일정 수준의 가이드라인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깜깜한 숲속을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준 작은 조약돌과도 같다. 아이돌 앨범 소개 글이 유독 다른 장르에 비해 길고 자세한 것은 전부 같은 맥락 위에 놓인 현상이다. 따지고 보면 ‘의도하지 않은 의미의 확장’ 자체가 의도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소속사가 제공한 몇 가지 단서만으로 수많은 해석이 탄생했다.


그래서 《OBSESSION》 앨범 커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엑소의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적대적인 존재와의 대립’이다. 그런데 사실 이미지의 의미를 끝도 없이 파헤치던 팬들에게 정답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놀이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의 핵심은 규칙이다. 재미있는 놀이는 그만큼 절묘하게 잘 짜인 규칙을 통해 완성된다. 세계관이라는 놀이터에서 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것은 바로 탄탄하게 설계된 규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관을 설정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관이라는 놀이터에서 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규칙을 설계한다는 것과 같다. 그 규칙은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밝게 빛나는 조약돌이 되어 팬들을 안내한다. 이 글의 중심 소재인 ‘새로운 범주의 앨범 커버’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완성된 한 장의 이미지로 그 의미를 모두 소진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나의 규칙이 되어 과정으로서의 무한한 콘텐츠를 담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과정을 설계한다’는 개념은 음악 시장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세계관이라는 개념도 그것을 상업적으로 풀어낸 분야는 영화 시장이 먼저였다. 2010년대 후반 큰 인기를 끌었던 ‘마블(Marvel)’의 히어로 영화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SNS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챌린지’ 문화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특정한 행동을 SNS로 인증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되는 효과를 노리는 ‘챌린지’ 문화는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진행된 ‘아이스 버킷 챌린지’처럼 공익목적을 띄기도 하고 최근 크게 화제가 되었던 가수 ‘지코’의 ‘아무노래 챌린지’처럼 마케팅을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정을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그 콘텐츠가 어떻게 소비될 것이지, 어떻게 확장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어떤 식으로 가지고 놀게 할 것인지, 즉, 규칙의 중요성이 점점 대두되고 있는 시대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속에서 앨범 커버는 그렇게 또 어떻게든 모습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시대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시장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카멜레온처럼 주변 환경에 적응해온 앨범 커버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노랫말처럼 끊임없이 음악을 대변해오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음악 시장의 변화가 앨범 커버를 통해서도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앞으로도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하게 이어질 것이라, 그렇게 상상해본다. 



글 월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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