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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의 감정 스위치

오늘도 퇴근을 하면 옷을 벗기도 전에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서 한참을 핸드폰을 바라봅니다.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별 관심도 없는 남들 페이스북 사진들을 엄지손가락으로 쳐올립니다.


아침에는 십 분이 모자라서 전력질주를 하면서도, 왜 밤에는 삼십 분을 이리 날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날 헛소리만 해서 보지도 않던 종편 시사토론 방송조차도, 퇴근하면 멍하니 그걸 듣고 있습니다.   


오늘도 회사에서는 나의 감정이 자유롭던 시간은 그리 많이 않았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 종일 전화벨은 울리고, 사람들은 찾아와 내게 말을 합니다.


불편한 옷을 입고, 불편한 사람들과 앉아서 웃고 싶지 않을 때 웃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을 합니다.

아 참. 갑자기 다음 주 카드 결제일이 생각이 납니다.


퇴근을 하고 한참이나 멍하니 이리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한 낮동안 내 몸과 영혼에 묻어 버린

정신적 미세 먼지들을 털어내는 순서를 거칩니다.


원래의 나의 의식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하루 종일 입고 있었던 노동의 옷과 마스크를 벗어 놓고,

다시 내 몸과 감정으로 영혼을 데리고 오기 위한 신성한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거치지 않고 날 지배했던 의식이, 곧바로 내 잠자리까지 그대로 묻어 들어오면

누워 있는 내 머릿속에서는 한낮의 상황이 재현이 되면서 나는 다시 머릿속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누워 있다가 갑자기 멱살 잡혀 훤한 노동판으로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머릿속으로 커다란 스위치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끄는 손짓을 하며 중얼거려야 합니다.


'난 퇴근했어. 생각 안 나. 생각이란 걸 안 할 거야.... ' 그런데 갑자기 이 스위치가 켜질 때가 있습니다.

감정조절 실패자 김 팀장이 보낸 카톡에 켜지기도, 회의실 선각자 최상무가 보낸 문자에 켜지기도 합니다.


신성한 나의 방구석에 그 자들의 시커먼 팔들이 쑥 들어와서 내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입니다.

머릿속으로 다시 스위치를 끕니다. 계속 올라가는 스위치를 또 내리지만 머릿속은 계속 환합니다.


TV를 끕니다. 그래도 귓속에서는 주파수 안 맞은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명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아침에 듣기 싫은 아이폰 기상 알람 소리보다는 낫습니다. 그냥 이 소리를 듣는 게 훨씬 낫습니다.


내일은 퇴근을 하면서 서점에 들러 볼까 합니다. 그냥 1만 7천 원으로 치킨 한 마리를 사 먹는 것이

더 나를 행복하게 만들겠지만, 뭔가 책들 사이에 서 있으면 조금 더 나은 하루를 보낸 것 같을 겁니다.


아 갑자기 다음 주 카드 결제일이 생각납니다. 책은 다음에 사야겠습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는 것을 또 까먹었습니다. 아. 식빵.... 김 팀장이 하라고 한 걸 까먹고 그냥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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