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던 몇 년 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저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공포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통증이었습니다. 육감적으로 심장마비가 오는 것 같다는 공포감으로 대형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여러 가지 증세를 이야기하니 응급실의 의사는 마치 흔한 일이라도 되듯 검사가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의사는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더 면밀한 검사와 긴급한 조치를 위하여 손목 동맥을 통해서 얇은 와이어를 심장까지 보내서 검사와 조치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나는 옷을 다 벗고 얇은 수술복을 걸치고 수술 침대에 누워서 엄청나게 큰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는 아주 단순한 생각들 밖에 안 났습니다. 여길 나 혼자 왔는데, 만약 내가 안 깨어나면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해야 하는데, 내가 집전화번호는 제대로 병원에 적어서 냈는지 그것만 계속 걱정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이 헌 것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마져 들었습니다.
별로 말하고도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서야 의사는 나에게 말을 했습니다.
심장은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말이죠. 다른 쪽에 문제가 있는 거 같으니 다른 날 내과에서 진료를 받으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오진을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손목의 동맥을 절개한 터라 손목에 칭칭 압박붕대를 두르고 고정을 시켜 놓아서 마치 손이 부러진 사람이 퇴원을 하듯이 터덜터덜 병원을 걸어 나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 난리를 치고, 병원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되어 큰돈을 내고서 병원을 나오는데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없다는 소리에 그냥 웃음이 나왔습니다. 안심이 되어 혼자 좋아서 웃었습니다. 정말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들과 저녁을 좋은 곳에 가서 먹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깃집에 가서 아이들과 웃으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오른팔을 못쓰니 아이들이 집어 주는 고기를 날름날름 잘 받아먹고 좋아했습니다. 내 심장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와 내 아이들이 고기를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은 서로 상승효과를 주는 듯이 나를 한없이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침에 누우니 비로소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내가 응급실에 실려가고, 수술대에 올랐고,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다시 집에 와서 이렇게 누워있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나지 않았다면?
순간 뭔가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득도의 순간이랄까요. 어릴 적 어른들이 하던 말씀들 중에 '바보도 득도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순간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냥 평소의 하루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그리고 퇴근을 해서 저녁을 아이들과 먹었고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라면? 오늘 하루 종일 끔찍한 일들을 겪고 나서 가졌던 행복했던 시간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상의 하루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면서 항상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면 이 질문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많은 굴곡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일도 생기지만 그만큼 나쁜 일도 생기기 마련이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일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일이 생긴 것에 행복해 하듯이,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은 그냥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것에도 행복을 느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수천번도 더 들었을 질문일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답을 하듯 하루를 삽니다. 우리 모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곳에 가고, 좋은 것을 가질 때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겠지요.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었을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때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겠지요.
그런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에 대해 행복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응급실에서 몇 시간 있어 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는 영안실이나, 교통사고 현장 같은 곳이 있다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내 이런 느낌들은 망각하게 되기 마련이겠죠
적어도 저는 그날 그 수술대에 누었던 기억과 같은 날 가족들과 저녁에 있었던 즐거웠던 저녁식사에 대한 추억은 잊을 수 없는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일상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보도 득도를 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