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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의 책상에 발을 올렸다

나의 상사는 꽤나 독특한 사람이었다. 매우 우수한 머리와 차분한 성격으로 일처리도 언제나 논리적이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해서 좋은 회사에 입사를 했고, 당시에 젊은 사람으로는 꽤나 좋은 차를 몰고 다녔다. 누가 봐도 엘리트였고, 사원이었던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 팀장은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일은 나에게 다 시키고는 회사일보다는 다른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사 후 몇 년 동안을 휴가를 제대로 가 본 적도 없고, 늘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나는 부서 내에서도 가장 일을 많이 하였지만, 그 팀장은 항상 나보다 그가 총애하던 직원에게 인사고과를 후하게 주었다. 그 직원은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도의 업무들을 처리하면서도 항상 팀장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나의 롤모델이었던 팀장이 점점 흑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렇게 가다가 부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를 것이 너무나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룹 감사팀에서 나를 보자고 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그 팀장의 문제를 자신들도 알고 있으니 나보고 다 말해 보라고 하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상사를 밀고한 직원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팀 사람들은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명함 한 장을 주고 생각이 바뀌면 전화를 하라고 하였다.


내가 함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5년 동안 회사는 나를 보호하지 않았는데 내가 뭔가를 그들에게 말을 한들 나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 그룹 감사팀이 아는데도, 고작 나 같은 사원 나부랭이의 진술이 없어서 그 사람을 처벌하지 못한다? 그건 그 조직이 나를 보호하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른 부서로 전배를 신청하였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도 가장 힘들어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던 부서로 보내달라고 신청을 했다. 거기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로 경력을 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내 아이가 태어나기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잠을 안 자고 일을 하다가 온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아 조퇴를 하고 집에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다 중앙분리대를 받았다. 그 바람에 출산을 며칠 앞둔 만삭의 아내가 병원에서 내 병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갑자기 그 팀장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분의 총애를 받던 그 직원도 갑자기 같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 사라진 그 직원이 너무나 큰 액수의 회사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제야 회사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왜 다른 부서로 전배를 갔는지 이해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씁쓸했다. 이미 그들과 관련된 소문은 회사 내에서 유명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고, 경영진들은 이런 소문을 들었으면서도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긴 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드라마 같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TMI라 생략한다. 하여간 그러고 나서 회사에서는 그 팀장이 있던 자리에 나를 임명했다. 나를 그렇게 그 팀에 돌아가서 팀장이 되었다.


발령 첫날 나는 하루 종일 정신없이 회의를 하였고, 밤이 되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 넓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로소 팀장 자리에 앉아 보았다. 넓은 책상, 왠지 더 푹신한 것 같은 의자, 커다란 전화기, 자리 옆에 있던 회의실 테이블과 의자들...  


나는 최대한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두 팔을 들어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의자를 젖혔다. 그리고 어두운 창밖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묵인하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오기로 더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런데 그 팀장의 자리에 앉으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 팀장이 앉던 책상에 앉아서 최대한 건방을 떨며 앉아 있으면 엄청난 성취감이 몰려오고, 그리고 그동안 남몰래 흘린 눈물에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나의 상사였던 그 팀장이 생각이 났다. 왜 그 사람은, 그 똑똑했던 사람은 왜 그렇게 했을까, 어쩌다 그 잘난 사람이 그런 길을 가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가 몹시도 밉고 원망스러웠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의 의자에 앉으니 갑자기 그 사람이 이상하게도 불쌍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에 대해 원망은 사라지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다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똑똑하던 사람이 빠지는 함정에 내가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앞으로 많은 경쟁과 사내 정치에서 살아남을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에 두려움이 같이 몰려왔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팀장이었던 사람은 다른 기업에 가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는 그날 이후 더 이상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난 정신없이 사니라 과거에 그들과 관련되었던 일들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한 팀의 공간도 차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그런 일들은 그 후로도 아주 많이 일어났었다. 그런 일은 사실 그냥 직장이라는 곳에서 흔한 일이 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의 분노와 원망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고, 더군다나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 있는 일들도 아닐 것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산다면 과거의 감정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런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리고 다시 잊혔다.


내 추억 속의 많은 빌런들은 그냥 그렇게 잊혀 갔다. 그들은 나에게 조그마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하찮게 망각되었다. 신이 주신 망각이라는 축복을 만끽하였다. 분명 축복이었다. 그게 그날 밤부터 깨달은 것이다. 팀장 책상에 발을 올리던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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