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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내 시소에서 내려줄래?

혼자 잘해주고 혼자 상처 받는 당신에게 //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세요? 자신은 꽤 오래 동안 어떤 사람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은 당신을 그저 시간을 보내기 편한 상대, 밥 잘 사주고, 술 잘 사 주는 그런 편한 사람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는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섭섭한 마음으로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자주 연락을 안 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와 함께 안 좋은 소리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듣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일 먼저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지 않나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많이 잘 못한 것이 있길래 저 사람이 저러는구나 혼자 자책하고 고민하게 되는 거죠.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그 사람은 당신이 왜 섭섭하게 생각했었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즐겁게 시간을 지낼 테니까요.


그런 그 사람의 뒷모습은  당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자신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 평가라는 것은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을 해야 믿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할까요?


생각해 보니 이 말도 틀린 것 같습니다. 매번 선거 때마다 당선되는 정치인들을 보니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결정한다고 옳은 일도 아닌 것 같군요.


어떤 사람들은 시소에 가만히 앉아만 있습니다.  


사람 관계는 시소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쪽을 위해서 힘을 쓰면 그다음은 다른 사람이 힘을 써야 되는 일이죠. 한 사람만 계속해서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은 그저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면 시소는 얼마 못 가서 멈춰 버립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멈춘 시소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 항상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누군가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무거운 시소를 들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시소가 멈추는 것이 자신의 탓이 될까 봐 겁을 내기도 하고, 그래서 맞은편 사람이 다른 시소로 갈까 봐 걱정도 합니다.


그런데 그걸 왜 걱정해야 하죠? 한쪽만 노력하는 관계는 어차피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의 결과이지 올바른 관계는 아닙니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후회하고 상처 받는 사람은 노력한 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인이든지, 친구든지, 선후배간이든지 어떤 인간관계에서 내가 노력하는 것에 비례해서 어느 정도 다른 사람도 노력하지 않으면 그 관계가 오래가긴 힘듭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에 너무 인간관계를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비난할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관계에서 줬으면 됐지 뭘 자꾸 받는 것을 기대하느냐고요. 맞는 말입니다. 글의 처음에 적었던 그런 경험을 많이 겪기 전까지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는 것만큼 정비례해서 기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노력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호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받더라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 이상의 것을 주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당당히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거라면 시소에서 내리라고 말이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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