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그는 변하지 않았다.
요즘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몸이 출근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씩 느껴진다. 처음에는 공원산책-오전요가-점심으로 하던 루틴을 요즘은 전보단 조금 느지막이 일어나 피아노 연습 30분-오전요가-점심으로 바꿔해보고 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 산책도 하고 피아노 연습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게 딱인듯하다. 요즘 오후에 다른 일정들도 많아서 가까운 곳은 걸어가면 따로 산책을 하지 않아도 꽤 많은 걸음수가 채워져 조금만 더 따로 걸으면 돼서 이 루틴으로 바꾸기도 했다. 오늘은 좀 따뜻한 것 같은데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산책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실내 산책장을 찾아봤지만 그런 것은 없네 ㅎ.ㅎ… 좀 더 따뜻하게 얼굴과 손도 둘러싸고 완벽무장을 하고 나오거나 108배로 바꾸거나 해야겠다.
무튼 피아노 레슨 시작 겸, 추워진 날씨 겸 아침을 피아노 연습 30분으로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악보를 읽고 손가락으로 실현하는데 버퍼링이 걸리지만, 연습할수록 부드럽게 연주되는 것이 느껴져 뿌듯하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연습하지 않을 나를 알기에 키보드는 사지 않을 것이다. 매일 30분 정도 연습하고 주 1회 레슨의 양이 딱 마음에 든다. 초등학생 때 생각도 나고, 그때는 학생의 생업(?)이었다면 이젠 취미가 되어 그런지 더 즐겁다.
아침 피아노 연습을 마치고 학원을 나왔는데 부재중 전화가 남아있었다. 교육청 장학사님이었다. 다시 전화해 보니 내가 청구한 고충심사에 대해 피청구인이 답변하여 메일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흠, 어떻게 보냈으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요가가 있으니 일단 오전 시간은 요가에 집중하고 답변서는 잊기로 했다. 오늘의 요가는 지난주에 후배 A와 함께 했던 ‘하타’다. 한 동작을 오래 유지하며 몸의 근육을 충분히 수축, 이완해 주는 운동이다. 오늘 하타는 지난주보다 더 강렬했다. 강사님께서 3일~7일 정도 허리가 아플 수 있다고 말해주셨다. 오… 제발 좀 덜 아프길…하지만 운동을 제대로 했다면 아파야 하는 걸 텐데….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원래 요가에 집중하고 머릿속을 비우기로 했지만 강렬한 하타에 정말 아무 생각도 못하고 허리의 근육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두유와 사과를 먹은 후, 잠시 쉬며 노트북을 켰다. 그의 답변서가 궁금했다. 장학사님이 요청한 자료를 보낸 후, 그의 답변서를 켰다. 10월 30일에 했던 간담회가 다시 떠올랐다. 인정과 재발방지가 없는 변명뿐인 답변서였다. 화가 났다. 그래서 답변서에 잘못된 내용을 표시하고 질의할 내용을 마구 적었다. 그러다 지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니 곧 상담 갈 시간이라 정리하고 상담센터로 출발했다.
상담사님을 만나 주말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거운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조금은 피곤한 나의 상태, 그의 답변서를 보고 화가 났던 것, 답변서에 잘못된 내용을 표시하고 질의할 것을 쓰다 왔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나는 왜 그 답변서를 보고 화가 났을까? 상담사님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좀 더 확실해졌다. 나는 상황이 이 정도로 진행되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재발방지에 대한 이야기가 답변서에 쓰여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변명만 늘어놓은 그 답변서를 보고 좌절했다. 상담사님은 피청구인의 대표적인 반응이니 그 답변서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원회에서 진술할 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해 주셨다. 답변서를 계속 보면 피청구인의 의도에 휘둘리게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답변서를 보지 말고 내가 이 과정을 통해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 보고 글로 정리해 보는 것을 추천하셨다.
상담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내가 이 지난한 과정을 왜 신청했는가에 대한 복기를 해보았다. 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교사들이 나처럼 병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년에 나는 전근을 가기 때문에 몇 개월만 더 참을 수도 있었지만, 내 몸이 참을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고 아무 과정 없이 조용히 병가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이 상황은 계속 반복되고 누군가 아프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 위원회에서는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다시 한번 써본다. 말로 내뱉는 연습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나의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알게 된 병가메이트 친구 C(이후에는 ’ 필로시코스‘라고 칭하겠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안 친구 C가 자신은 ’ 필로시코스‘로 등장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는 반달이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다며 저녁에 반달이와 같이 공원산책을 제안했다. 참 고마웠다. 고마운 제안이었기에 당연히 수락했다. 귀여운 가방이 달린 옷을 입고 온 반달이는 역시 나를 치유해 준다. 오전에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왔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필로시코스가
“쿼카 어딨어? 쿼카?”
라고 하니 내 쪽을 보고 겅중겅중 달려온다. 어떻게 내 냄새를 이렇게 잘 알아채는 거지? 귀엽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강아지들은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여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반달이가 실컷 맡고 싶은 만큼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돌아다녔다. 공원 안쪽에서 필로시코스는 잠시 앉아있고 나와 반달이만 돌아다녔는데 중간중간 필로시코스가 있는지 없는지 돌아보며 확인하는 모습도 정말 귀여웠다. 꽤 냄새를 많이 맡은 반달이에게
“필로시코스 어딨어? 필로시코스? “
하니 필로시코스가 앉아 있는 쪽으로 겅중겅중 달려간다. 반달이 정말 똑똑하네. 필로시코스를 찾은 반달이는 다시 냄새 맡기를 시작한다. 아직 다 맡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여기를 세 바퀴는 돈 것 같은데 아직 못 맡은 냄새가 있었나. 그러다 필로시코스가 반달이한테 장난을 친다고 반달이가 못 보는 곳으로 숨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필로시코스 어딨어? 필로시코스?”
하니 반달이가 두리번두리번하더니 필로시코스가 원래 앉아 있었던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있어야 할 필로시코스가 없으니 코를 킁킁대며 필로시코스의 냄새를 찾는듯했다. 그러더니 필로시코스가 있는 곳을 찾았다. 강아지의 후각이란! 우리 둘 다 반달이가 똑똑하다고 감탄하며 마저 공원 한 바퀴를 돌았다. 반달이와 함께하니 역시 힐링되고 시간도 잘 간다. 오늘은 번개 반달 똑똑이었고 내일은 약속된 반달 똑똑이다. 번개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했던 반달 똑똑, 덕분에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로시코스와 반달이에게 고맙다. 내일 또 만나자, 필로시코스 그리고 반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