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볼 빨간 쿼카 Dec 25. 2023

볼 빨간 쿼카의 병가일지

EP.20- 쉬어가자

집을 안 돌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삶에 바로 영향을 주는 설거지나 빨래는 그래도 그때그때 해냈지만 집 정리, 청소는 조금 흐린 눈으로 살면 불편하지 않으니 그냥 두었다. 바로바로 정리하면 따로 치울 일이 없다고 항상 듣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나의 상태를 잘 모르겠을 때 확인하는 곳은 집이다. 가장 상태가 좋을 때는 매일 간단한 청소를 하며 집이 정돈되어 있고, 상태가 안 좋아질 때 정리-청소-빨래-설거지 순으로 미뤄서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싱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를 보고 모른척하며 하염없이 미루고 있을 때는 나를 돌봐야 하는 상태인데 나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집 상태를 볼 때는 적당히 건강한 상태인데 이번에는 내 몸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요즘 오전, 오후, 저녁 할 것 없이 바쁘게 지냈더니 몸이 좀 쉬라고 신호를 보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한몫 거든 듯했다. 요가 수업에서 운동한 근육들이 아우성치고 팔꿈치와 무릎에 한기가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잘 쉬고 풀어주는 시간도 중요한데 이번주는 그것을 잘 못했다. 아무래도 주말은 약속을 잡지말고 집에서 보내며 몸도 쉬고 집도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침 배경음악을 틀며 오늘 아침 겸 점심은 호밀빵에 직접 만든 두유 그릭요거트에 블루베리와 사과를 얹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호밀빵 확인, 사과 확인, 블루베리 확인, 두유 그릭요거트….아뿔싸 한 끼 먹을 정도 남겨둔 그릭요거트를 이번주에 방치해 두었더니 상태가 참혹해졌다. 아깝지만 미련을 갖지 말고 버려야 한다. 바로 싱크대로 직행한다. 나의 정성이 담긴 두유 그릭요거트 안녕…. 다음에 금방금방 먹을 수 있을 때 다시 만들게. 아침 겸 점심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근처 슈퍼에서 크림치즈를 사 그릭요거트를 대체하기로 한다. 데워둔 한약을 마시고 옷을 챙겨 입고 슈퍼로 향한다. 크림치즈를 집고, 저녁에 샐러드를 해 먹을까 하며 집는다. 내일 것도 사갈까 하다가 내일 것은 내일 사러 오자!라고 매일 움직일 수 있도록 조금씩 자주 사기로 한다. 그런데 슈퍼가 내일 영업을 안 한다고 한다. 이런, 내일 메뉴는 뭘로 할까 하다가 1+1 하는 롤유부초밥을 하나 더 집는다. 슈퍼를 나와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두부 만드는 가게에 들러 두부 두모를 산다. 내일은 두부 유부초밥을 만들어 먹어야지. 나의 계획성에 감탄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나의 점심 메뉴 선정은 완벽했다. 빵과 과일과 크림치즈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내가 나를 위해 차린 끼니는 속을 더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적당히 내게 필요한 만큼 조절해 먹을 수 있어 좋다. 그래서 가끔은 회사에 도시락을 싸가기도 했었다.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오래 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 에너지의 양을 알기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만들어주시는 조리사님들께 정말 감사하다. 가끔은 그 밥이 그립기도 하다.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라는 마음의 짐을 가진 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다. 마음의 짐보다 내 몸의 쉼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그러다가 상자 하나를 펼친다. 지난주 화요일에 만났던 후배 A가 우리 집에 왔었는데 우리 집 상태를 보고는 정리하는 꿀팁이라며 일단 상자에 정리 안 된 물건을 다 담아놓는 것을 먼저 하라고 말했다. 그럼 일단 공간이 깨끗해지고, 물건들은 천천히 하나씩 꺼내며 정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잔소리하지 말라며 흘려들었는데 청소가 마음의 짐이 되었으니 일단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상자를 펼쳤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아직 청소를 할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체력을 다시 회복하니 현관에 내버려두어진 택배라도 뜯어 정리해야겠다 싶어 택배 상자를 뜯었다. 주문한 옷이 왔다. 상의, 하의, 코트를 샀는데 코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컸다. 반품하기로 하고 반품접수를 한 후 다시 상자에 포장한다. 다음 상자를 뜯는다. 어제 시킨 두유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요즘 운동하고 나서 두유를 매번 챙겨 먹었더니 두유가 빨리 줄어들어 주문했다. 상자를 뜯어 나온 두유는 간식 수납대에 정리하고 상자는 정리한다. 됐다. 다시 소파에 눕는다.

소파에 누우니 오늘 활동량은 어떻게 달성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기로 했지만 기본 루틴은 지키고 싶었다. 산책을 하거나 108배를 해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코트를 반품하기로 했으니 새로운 코트를 찾아 산책 겸 쇼핑몰까지 걷자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계속 있으며 청소를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온 김에 피아노 연습도 좀 하고 가기로 한다. 피아노 연습을 하고 도착한 쇼핑몰은 사람이 많다. 처음에 본 코트가 마음에 들었는데 좀 더 둘러보고 구매하고 싶어서 내려놓았다. 그 층을 돌아보며 코트 몇 벌을 더 입어보았는데 처음 본 코트가 괜찮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때때로 스트레스 반응(나에겐 두통, 가슴 답답함 등으로 나타난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반응이 올라오니 옷에 집중도 안 돼서 처음 봤던 코트를 사고 쇼핑몰을 나왔다.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쐬니 좀 나아진다. 한 손엔 코트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원래는 들깨 수제비를 먹을 계획이었는데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두부치즈봉 샐러드를 먹었다.

오늘 마음의 짐 때문에 펼쳐놓은 상자에는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고 내일 대청소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나는 내일 대청소를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볼 빨간 쿼카의 병가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