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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 빨간 쿼카 Jan 01. 2024

볼 빨간 쿼카의 병가일지

EP.23- ‘일단’의 마법

오늘은 오전 피아노 연습이 없는 날이다. 피아노 조율이 필요해 연습실 사용이 오후 6시까지 불가하기 때문이다. 매일 하는 반복적인 활동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또 그 활동이 무너지면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오늘 체감했다. 피아노 연습을 안 가게 되니 운동도 가기 싫어졌다. 취소할까 말까 이불속에서 30번은 고민했다. 어제 맞은 예방접종도 그럴싸한 핑계가 되었다. 괜히 팔뚝이 아픈 것 같고 힘이 없는 느낌이다. 뭔가 눈을 뜨면 자연스레 운동복을 입고 피아노 학원에 가서 연습하고 운동을 하고 집에 오면 점심을 먹는 것이 당연했는데, 피아노 연습 시간을 생각의 시간으로 채우니 안 하고 싶은 이유만 백가지로 늘어났다.

’ 안된다. 일단 소파로 가자.‘

30분 동안 ‘운동 가기 싫은 나 vs 이 루틴을 유지하고 싶은 나’로 싸우다가 결국 침대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엔 소파에 누워 생각한다.

‘어제도 흐리고 오늘도 흐리네. 햇빛은 언제 볼 수 있나. 운동 가기 싫다.’

안 하고 싶은 이유가 백 한 가지가 됐다. 일단 세수랑 양치를 하자. 일단 한약을 먹자. 일단 운동복을 입자. 일단 아침약을 먹자. 일단 운동화를 신자.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자. 늘어진 몸을 한 발짝 한 발짝 마음속으로 밀며 요가센터에 데려다 놓는다. 요가를 할 땐 선생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에 따라 몸의 이곳저곳을 신경 써야 하니 안 하고 싶은 이유가 들어올 틈이 없다. 그리고 운동을 하니 기분이 좋다. ‘일단’으로 시작하여 요가센터에 데려다 놓은 쿼카는 이제 무기력에서 벗어나 다시 활동성을 찾았다.

다시 찾은 활동성으로 점심을 먹고 상담도 가고 한의원도 가고 저녁도 먹었다. 정신을 차리니 7시다. 멍해지니  또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일 고충심사위원회인데, 어떻게 진행되려나? 무슨 질문을 나에게 하려나?‘

어렵지만 용기내야 하는 일,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보장되지 않는 일을 상상하자 긴장감과 불안감이 올라온다.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거기서 꼭 하고 싶은 그 말만 생각하자.’

는 나도 있지만 멍하니 있으면 ‘불안한 나와 단단한 나’가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아무래도 머리를 비워야겠다. ‘일단’ 나가자. 일단 잠바를 입고, 일단 운동화를 신고, 일단 문을 열고, 일단 나가자. 그리고 아침에 피아노를 못 쳤으니 일단 피아노 학원에 가자. 피아노 학원에서 악보를 읽으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맞게 쳤는지 귀로 확인해야 하니 긴장감과 불안감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렇게 긴장감과 불안감을 낮출 수 있었다.

내가 병가동안 반복했던 활동들이 나를 무기력함과 불안감에서 지켜주었다. 뭔가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려고 할 때, 일단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좋다. 그저 병가동안 늘어져있고 우울해만 있고 싶지 않아 시작한 활동인데 이렇게도 도움이 된다. 오늘 내가 느낀 무기력함과 불안감은 언젠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면 당장 이 글을 쓰고 난 후일지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싶을 땐 그 감정들을 품고 시간을 보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기억해야겠다. 나에겐 ‘일단’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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