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와 그녀

2011년 11월 5일. 우리는 어느 쇼핑몰 앞에서 만났다. 회색 니트에 검은색 반지를 끼고 나타난 그가 난 참 어른처럼 보였다. 든든한 어른이 절실히 필요했던 나는 금방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 다행히 그도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에게 전했다. 그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내가 무척 좋아하니 ‘얼씨구?’ 정도의 반응만 보였던 듯싶다. 사실 엄청난 축하를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으니 상처받지도 않았다. 그냥 넘쳐흐르는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두 알고 있듯 연애에는 즐거운 순간만 있지 않다. 연인이란 자고로 싸우고 화내고 미워하고 돌아서는 것이지. 나의 연애도 그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관계의 깊이,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너무 깊었다. 마치 밑이 안 보이는 우물과도 같아서 어떤 말을 던져도 어둠 속에 다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던져진 말들은 우물 안에서 쌓이고 썩어 갔다. 그 시절에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녀라는 우물 속으로 많은 것들을 던져 넣었다. 내가 그녀에게 내 연애의 불안함과 화남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 불안해져 갔다. 약속이 있어 나가는 날은 언제 들어오며, 무엇을 할 예정인지 꼭 물었다. 그녀에게 말했던 시간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핸드폰이 터질 듯이 진동이 울려댔다.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도 그처럼 날카롭게 나의 마음을 울렸다. 

그때 나는 그와 이제 막 이인삼각 게임을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같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 속도 그리고 박자도 맞춰나가야 했다. 때로는 내가 넘어졌고, 때로는 그가 쓰러졌다. 달려가려는 방향도 맞지 않아 서로를 원망할 때도 있었다. 거기다 내가 이 힘든 이인삼각을 하면서 더 괴로웠던 건 출발선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외쳐대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제발 한 사람만 괴롭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던 나였지만, 당시 그에게는 나의 힘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일이었나 보다. 그는 우리를 묶고 있던 줄을 끊고 달아나 버렸다. 나는 끊어진 줄과 함께 남겨졌고, 그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며 어서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바보처럼 그를 향해 달려가 보기도 했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고, 달려가는 나를 보며 그녀는 더 절실하게 내 이름을 부렸다. 나는 터덜터덜 그녀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역시 그녀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던 것도 같았지만, 그 말을 들려줄 만큼의 여유가 나에겐 없었다. 

이제는 안다. 그녀가 나를 그렇게 애타게 불렀던 건 행여나 내가 당신과 같은 삶을 살까 겁이 나서였다. 사실 그녀는 혼전임신으로 나를 낳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그래서 나의 연애는 그녀에게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원망스러웠던 것도 같다. 왜 모두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그때 조금 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이지만 해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연인이 되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녀뿐이었다. 나는 모두의 평화를 위해 그가 돌아왔음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의 연애가 2012년에 멈춰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멈춤이 본인의 불안 탓이라는 이야기도 이따금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적막 같은 고요함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는 내곁에 없지만 언젠가 내가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 고요함도 유리창 깨지듯 깨져버릴 거라는 걸 안다. 그때가 되면 더 아름답고 안전하게 깨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