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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난나 Aug 10. 2022

아빠를 이해하기 위하여

내가 어릴 적 아빠는 조그마한 동네 수족관을 운영하셨다.​


주말이면 동생과 함께 아빠의 수족관에 놀러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며 놀기도 하고


점심이면 짜장면 배달을 시켜 아빠와 맛있게 나누어 먹고,


손님이 올 때면 가게 뒷쪽의 손님 안보이는 공간으로 가서 숨바꼭질하듯 손님이 가실 때까지 가게에 없는 척하며 기다리기. ​


나에게 몇 안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하나이다.​


그러던 아빠는 어느날부턴가 열심히 설계도? 같은 것을 그리시 시작하셨다. 반듯한 네모모양이 주를 이루던 어항들은 오각형, 길쭉한 세모 모양 등 다양한 그것들로 교체되고 아빠는 화려한 어항들과 함께 유명한 쇼핑몰에 수족관 입점을 성공시켰다. ​


조그마한 동네 수족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쇼핑몰 수족관은 휘황찬란했고, 아빠는 멋있는 양복을 입고 우리를 맞이하셨다. 놀이동산이 있는 그곳에 우리 수족관이 있다니.. 어린 마음에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렇지만 오색찬란해보였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쉽게 말해, 관리비와 같은 고정지출은 매달 발생하는데 매출이 그만큼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거대한 쇼핑몰에 속해있던 수족관은 그렇게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아빠와 엄마는 싸우는 날이 잦아졌다. ​


어느날부턴가 집에는 채권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


아빠는 집에 늦게 들어오실 때도 많았고, 사업의 어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일 술을 드셨다.

엄마는 부업처럼 하시던 일을 생업으로 하시기 시작했고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하셨다. 그래도 난 동생 둘이 있어서 외로움을 느낄 틈이 별로 없었다. ​


학교에서 돌아오면 국을 데워서 동생들과 밥을 먹고 집안을 어지르며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부모님 오실 시간이 되면 빛의 속도로 집안을 치웠다(치웠다기 보다는, 책상 밑 같은데에 물건을 쑤셔 넣는 수준이었다;;).



가세가 기울어가는 것과 달리 동생들과 나, 우리는 노는 것이 즐거웠으니... 일찍 철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 같다. ​


그렇지만 우리의 천진함과 발랄함은 한번씩 집을 찾아오는 사납고 무서운 채권자들의 방문에 얼어붙기도 하였다.​


채권자들은 어린 우리들을 심하게 몰아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엄마에게는 모진 말을 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


아빠 대신 무거운 빚의 짐을 짊어진 엄마...

어린 날, 나는 피하기만 하는 아빠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가 사업을 해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힘들게 되었는데 아빠는 왜 직접 맞서서 해결을 하지 않는걸까? 왜 힘없는 엄마만 빚쟁이들에게 사정하는 걸까?

아빠는 점점 더 술을 많이 드셨고 우리집은 점점 더 좁아져갔다. 그렇지만 단칸방에 쪼르르 누워서 잠이 들었을 그 때에도 동생과 나는 뭐가 좋은지 자기 전까지 장난을 치고 아껴둔 과자를 먹고 자느라 이빨이 다 썩었었다.


힘든 시절이기는 했어도, 기쁜 기억들은 있다. ​


아빠가 거대한 쇼핑몰에 입점해있던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 6개를 사오시면 동생들과 손뼉을 치면서 나누어 먹었던 일(나는 그때 그 도너츠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도너츠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먹으면 왜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 걸까?..^^;),



여름이 되면 근처 계곡으로 놀러가서 계곡 물속에 넣어두는 자연 냉장? 방식으로 시원해진 수박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으며 함박웃음을 짓던 일 등등(생각해보니 주로 먹을 것과 관련된 추억이다, 언젠가도 생각했지만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는 힘든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시절 사진 속 아빠의 얼굴은 우리의 환한 얼굴과 달리 무뚝뚝하고 굳어있다.



무거운 가장의 어깨,


그걸 잘 알면서도 가장답게 해결할 수 없었던 빚의 무게가 아마도 아빠를 짖눌렀을 것이다.



아빠는 그때쯤, 생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복권을 매주 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벼랑끝으로 내몰린 한 가장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 복권은.



하지만 복권이 당첨되기도 전에 아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 나이 마흔아홉, 내 나이 열일곱이었다. ​


그때부터 나는 아빠를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던 것 같다. ​


아빠가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 때문에 우리 가족이 더 힘들어졌다는 원망을 할 만큼 머리가 굵어졌을 때, 그 원망의 대상인 아빠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나는 사춘기에 진입한 치기어린 마음과 미움과 분노 속에 아빠한테 모진 말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빠와 나 사이는 더욱 더 악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갑작스런 아빠의 부재는 오히려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멈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아빠의 부재..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더 깊어졌다.


대학 졸업 후 잠시 취업 준비를 하면서 원하던 회사의 입사 시험에 떨어졌을 때,


힘든 연애의 끝에서도 운명적인 사랑일지 모른다며 인연의 끈을 놓지 못했을 때,


마지막이라 생각한 사시 2차시험에서 도시락을 가져다주기로 한 동생이 가게 일 때문에 늦는 바람에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울면서 본 그 시험의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


결혼을 앞두고 내 옆의 이 남자가 평생을 함께 할 만한 남자인지를 아빠에게 확인받고 싶었을 때,


결혼 후 시댁에서 시아버지께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을 때에도,


내 어릴 적 모습을 빼닮은 호야가 태어났을 때에도,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고, 물어보고 싶고, 뭐라도 답을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수염이 조금 난 까끌까끌한 얼굴로 내 얼굴에 뽀뽀를 해주던 아빠 품의 느낌이 이상하게도 큰 일이 있거나 좌절을 했을 때에는 몹시도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빠를 꺼내어보고 회상하는 일.



아빠가 가신 후로 아주 오랫동안 그것은 ‘추억’하는 일이 아닌 대부분 ‘원망’하는 일이었다. 무언가 세상일이 내뜻대로 되지 않거나 억울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아빠의 부재로 책임전가를 해서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못난 내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MRpMpHFz6eQ?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그러나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때 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나이가 든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나보다 엄청나게 현명해지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삶의 대부분의 것들을 통제 가능해질 것이라는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오랜 기간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빠와 화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아빠는 가진 것 없어도 떳떳하게, 양심적으로 세상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어릴 적 동네 슈퍼 앞에 떨어져있던 과자를 몰래 집어온 나에게 아빠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설교를 하셨었다.


“공부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다”라고..



아빠는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인 것보다 사람 됨됨이를 갖추는 아이가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 아빠는 내가 밤늦게 공부를 하고 있으면 얼른 불끄고 자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빠에 대한 반발심?과 청개구리 같은 습성에 아빠가 잠드시기를 기다렸다가 단칸방 구석에 자리한 책상 스탠드 불을 몰래 켜고 새벽까지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는 늘 “공부보다는 사람이 돼라”는 아빠의 이야기가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한 신문사 주최 전국 고등학생 논술 경시대회에서 입상해서 받은 손목시계를 늘 차고 다니시면서 그렇게 큰딸 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내 앞에서는 칭찬과 격려도 잘 해주지 않으셨으면서..



무뚝뚝한 성격 탓에 애정 표현은 잘 하지 못하는 아빠였지만 나를 보는 아빠의 눈빛에 자랑스러움과 믿음이 담뿍 담겨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그리고 아빠의 그 올바른 마음과 믿음이 무의식 중에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마치 튼튼한 토양 위에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듯 아빠의 단단한 믿음이 아무리 모진 비바람도 견딜 수 있는 삶의 지지대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과 세월이 흐르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원망과 미움에서 벗어나 아빠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무엇보다 아빠를 미워했던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덤벙거리지 말고~!”


토마토를 급히 자르다가 손을 다쳤던 나에게 늘 해주시던 무뚝뚝하지만 속으론 다정한 아빠의 말처럼 이제는 나도 아빠에게 쪼끔은 다정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다.



“아빠,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술 좀 그만 먹고 건강 잘 챙겨~~!


나도 아빠처럼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호야 생각해서 자제하고 있으니까~~!


엄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고 막내도 서툴지만 자기 앞가림 잘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제는 우리 걱정하지 말고 아빠가 정말 행복하게 잘 있었으면 좋겠어~~^^


건강하고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


아빠, 많이 고마웠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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