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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ug 04. 2020

단형을 처음 만난 12월-2

따뜻했던 12월 겨울의 단형


사실 저는 제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찍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수록 더 많은 정보들을 무기 삼아 저를 더 비난하고 학대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실을 아버지를 통해 처음 배웠고 그 다음에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를 향한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저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매우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를 눈에 보이지 않는 채칙질로 벌하고 자책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처럼 저에게 맞는 신발을 절대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제 자신에게 매우 화가 나곤 했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이 제 첫 번째 결혼을 망쳤습니다. 전부인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올수록 저는 좀 더 멀어져 갔고 제 행동은 나빠졌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다룰 수 있도록 상담사들을 찾아갔지만 저는 마약중독자나 알콜중독자 같았습니다. 이상하고 남다르게 행동하는 스스로를 벌하지 않는 이상 평범하거나 정상적인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물론 남들처럼 평범하게 행동하는 척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저는 차분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저의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고 보고 싶어하는 저의 가짜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연인들과 깊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실제로는 저를 잘 알지 못했고 제 삶에 대한 거의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두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첫번째 모습은 제가 집 밖에서 사람들과 만날 때 사용하였는데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뀔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모습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집에 있을때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제가 처한 상황에 맞게 성격을 조금씩 바꾸려고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 감정을 숨기고 다름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계속 하기위해 너무 많은 신경을 써야 했고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8월의 어느 무더운 오후, 제가 윤선생 영어 교육학원에 Spelling Bee 경연대회를 심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저는 한 여성이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그녀가 제 인생을 영원히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아내가 암 투병에서 실패한 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 2008년 그날 오후의 모습과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3분 차이로 그녀의 마지막 임종을 놓쳤습니다. 그러나 7월 10일 그 끔찍하고 끔찍했던 오전 11시 28분에 눈물을 흘리며 저는 제 아내를 처음 만난 날 그때의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상주 시민회관에서 그녀가 무대 위 단상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때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미소에 저는 몇 초 동안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녀때문에 경영대회 1부때 학생들에게 집중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서산병원에서 췌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예비 진단을 받았을 때 저는 두려웠습니다. 6월 23일 그녀가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갔을 때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석사 학위를 위해 영국에 해부학을 공부하러 갔었기 때문에 저는 아내가 일주일도 안되어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정말로 암이라면 일주일 전부터 그녀가 앓기 시작한 통증 증상이 암의 초기 증상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해서 종양을 꺼냈을 것입니다. 그녀가 집에 와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좋아! 끝났구나!


그러나 의사가 단형씨가 췌장암 4기라고 알려준 후에는 저는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저는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췌장암 4기 환자는 생존율이 극히 낮았습니다. 그날부로 저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8월에 Spelling Bee 경영대회 이후 저는 단형씨를 상주 근처에서 주기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저는 그녀를 마트에서 보거나 그녀가 차를 타고 어딘가로 운전하고 있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8 년 12월28일 오후 용운중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도중에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쪽지에는 “대니”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니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걸었고 단형씨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용운중학교로 오는 중이라고 말을 했지만 오지 않았었습니다. 나중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우리는 잠깐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그녀를 저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망설였지만 마침내 저의 초대를 수락하였습니다. 

올 해도 종종 입었던 엄마의 예쁜 은색 투피스

2008년 8월에 Spelling Bee경연대회 이후 우리 모두 다같이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단형씨는 제 근처에 앉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그녀는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파트 건물 바로 밖 그녀의 차 안에서 우리는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결혼을 했었고 2명의 자식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녀의 블로그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그녀는 저를 만나기 오래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고 “물론 그녀는 결혼을 했을 거야. 그녀는 결혼을 안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라고 생각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녀에게 집에 데려다주어서 고맙다고 말했고 솔직히 그날이 제가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앉아있는 브래들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저의 초대를 수락하였고 12월 30일 저녁 8시에 저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단형씨는 주저하고 긴장하였습니다. 저는 최대한 침착하고 멋지게 행동하려 노력하였지만 저도 그녀만큼 긴장하였습니다. 저는 차를 끓였고 우리는 그날 밤 몇시간 동안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둘 다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녀가 이혼을 하였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저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밤 그녀는 다시 우리집으로 왔고 제가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진저에일 음료수를 마시며 함께 다가오는 새해를 축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거의 매일 저녁 퇴근 후에 저의 집을 들렸습니다. 

2008년 12월 30일 그날은 제가 진정으로 삶을 살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불신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저의 아버지가 저에게 끼쳤던 나쁜 영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누군가와 함께할 때의 제 모습이 진정한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형은 저의 모든 불행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다 날려버리게 해 줬습니다. 이러한 일 들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고 서서히 일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하였습니다. 모든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저를 직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단형씨는 제가 왜 마블처럼 슈퍼 히어로 영화들을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그녀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제가 느꼈던 상처와 실망 그리고 분노까지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대륙에서 왔고 두 개의 다른 모국어와 두 개의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비슷한 마음의 상처를 공유했습니다. 


삼성병원 의사가 암 진단을 내린 후 사랑하는 아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매일같이 저는 제 자신과 제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제 스스로가 싫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녀가 제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줬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힘과 용기를 줬고 마음을 놓아도 괜찮다고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하도록 도왔지만 그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저에게 일어난 건가요? 제가 어떻게 살았었나요? 제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었나요? 보시다시피 너무 이기적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정적이었던 에너지들이 다시금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단형씨는 저를 자유롭게 벗어나게 하고 동시에 마약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나의 심장이었고 그 사이로 흐르는 피와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병실에 그녀 옆에 앉아있었는데 그녀가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요?” 라고 반복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제 말을 들을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계속 그 말들을 반복하여 말할 때 마다 저의 어린시절 기억과 모습들 그리고 제 인생의 아픈 상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과 모습들은 천천히 잊혀 갔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잊혀 가면서 제 마음 속에 있던 그녀에 대한 기억들과 모습들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녀를 본 첫날부터 그녀가 제 방에 처음 오고 함께 우리가 여행하고 결혼하는 날까지 함께 웃고 떠들며 보낸 시간들은 내가 그녀를 만나기 전 느꼈던 모든 힘들었던 일들을 잊게 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자 저의 이기심도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아플 때 엄마한테 브래들리가 보내준 사진

그녀를 떠나 보냈을 때 저는 오직 그녀의 육체만 잃었습니다. 저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고 감춰져 있던 저의 모습들을 찾게 도와줬던 그녀에 대한 좋은 기억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옛날의 나쁜 기억보다 훨씬 크고 강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녀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립습니다. 저는 그녀가 자고 있을 때 그녀를 껴안는 것과 매일 밤 그녀가 퇴근하고 집에 올 때 저에게 해 준 입맞춤과 제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저를 위로 해주던 그녀의 손길 모두다 그립습니다. 비록 제 옆에 있지 않지만 저는 그녀가 여전히 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12년 전 우리가 함께 했던12월의 매우 추운 날 밤처럼 저와 함께 있습니다.

엄마가 핸드폰으로 직접 만든 청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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