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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15. 2021

눈치가 빠른데, 눈치를 안 봐요.

Anti also free!!




https://youtu.be/0T-3MUqc3hE


악동뮤지션의 'freedom'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옷 없이 걷고 싶어, 아무 상관없이 시선'

'집 없이 살고 싶어, 온 세계를 누비며'

'돈 없이 살고 싶어, 온 세상을 가지며'

'날 사랑하는 것 free, anti also free'



이 부분을 정말 사랑한다. 혼자 운전하며 달릴 때 이 부분을 따라 부르면, 진짜 옷 없이 돈 없이 집 없이 날 미워하든 말든 신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미친 기분이 든다. (사실 옷도, 돈도, 집도, 관심도 정말 좋아하면서 웃긴다.ㅋㅋㅋ)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평소에 얽매여 있던 것들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중 특히


'anti also free'라는 노랫말은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탁 하고 꽂힌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말이다.






어렸을 땐, 누가 내게 관심이 없거나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적어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했다. 이건 어떤 무리에 소속되고 싶고, 소외받고 싶지 않은 동물의 본능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누가 나를 싫어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단 소리를 어디서 전해 듣고 가만 두지 않겠다며 결기에 차서 걔가 누군지 찾아다녔다. 중고등학교 때도 친구든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으면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학교나 직장에서 나름 '인싸'였으면 하고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인기를 갈구했다.


근데 진짜 어른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점점 명확해졌다.  "넌 호불호가 진짜 뚜렷해.", "어쩜 그리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딱딱 표현을 하고 다니니?"와 같은 말을 듣는 사람으로 컸다.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쫓아다니며 좋아하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싫어하는 것을 삶에서 거침없이 제외시켰으며 싫어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거절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이거나 객관적으로 비호감인 것이 아니고 단지 나와 성향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러면서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됐다. 단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기호에 기반한 판단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종종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도 갖지 않았고,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상처 받지 않았다.







근데 이 안티를 용인하는 쿨한 마음의 묘미는 이것을 깨닫고 난 후의 변화이다. 누구든 나를 싫어할 수 있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되면,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아부의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기 싫은 치장을 할 필요도 없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열심히 필요도 없으며

나와 친하지 않지만 대단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내가 의미를 두지 않는 일을 잘할 필요도 없어진다.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위해 나의 기호나 욕망을 억누르고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면 여전히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내 커리어에 중요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많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은 용기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자타공인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비언어적인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기분이나 의도를 알아내는 것, 언어적인 것을 듣거나 보고 이면의 요구를 알아내는 것,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에 꽤 능숙한 편이다.


하지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나 남에게 미움받을 것을 걱정하여 '눈치를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나'의 감정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하고, '개인'의 개성보다는 '집단'의 질서가 중요한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 50명 남짓의 떠들고 싶은 아이들이 조용하게 빼곡히 앉아있던 교실이나 몇 백 명이 줄을 맞춰 땡볕 아래 서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던 운동장은 지금 돌이켜 보면 좀 숨이 막힌다. 배려와 질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혼자서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지나치게 '전체'나 '집단'을 우위에 두는 문화는 개성과 소신을 표현해야 할 때조차 '눈치를 보는' 개인들을 만들었다.


업무가 끝나서 정시 퇴근을 하면서 눈치를 보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상사의 표정이 나쁘면 눈치를 보고

튀는 옷을 입으면 애들이 뭐라고 할까 눈치를 보고

이 나이에 이런 옷을 입으면 주책없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남들 다 가는 여행을 안 가면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이런 글을 브런치에 올리면 욕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다들 볼 필요도 없는 남 눈치를 본다고 사는 게 더 피곤해진다.



먹고살려면, 뭐라도 되려면 어찌 눈치를 1도 안 보고 살 수야 있겠냐마는


나는 'Anti also free!'를 외치며 불필요한 눈치를 덜 보게 되니,

사는 게 훨씬 편안하고 심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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