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 작가님의 '하는, 사랑'
그대는 신이나 그의 사원을 위해, 국가나 강력한 문화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
- 에피쿠로스, '쾌락' 중
얼마 전,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을 다시 읽었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문장'에 매료된다. 내가 쓰는 사람이 되고 싶게 한 시작도 그녀의 문장들이다. 매력적인 문장을 읽고 거기에 멈춰 그것을 음미할 때, 내 머릿속은 상큼한 과즙이 입안에서 퍼질 때처럼 향긋해진다. 반대로 내 머릿속에 숨겨온 문장들이 하얀 모니터를 채워갈 때, 나는 다른 이의 문장을 읽을 때보다 더한 상쾌함에 설렌다.
열거하라면 더 많지만, 이런 것들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내가 완전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부드러운 한우 눈꽃살이 입안에서 녹으며 그 뒤로 쌉쌀하고 묵직한 레드 와인이 넘어갈 때.
막 목욕을 끝내고 보들보들한 모달 파자마를 입고 그 위에 뿌려진 프리지아 향을 맡을 때.
지금 밖에 나가면 볼 수 있는 갖가지 연두와 초록을 눈 안 가득 담을 때.
비가 오는 밤, 랜덤 재생 중인 음악을 듣다가 이소라의 '신청곡' 같은 노래가 나올 때.
내 혀가, 살갗이, 코가, 눈이, 귀가 즐거워한다. 영혼의 쾌락 못지 않은 육체의 행복을 느낀다. 그렇게 즐거워진 육체는 영혼을 깨우고, 깨어난 영혼은 다시 기분 좋게 육체를 자극한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감싸고 있는 '육체'라는 실체로 나는 이루어져있다. 내게 '영혼'만큼이나 내 '육체'는 소중하고, 행복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하는 이와의 정서적인 교감은 즐겁다. 그것을 위해 나는 그이를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한다. 그 대화는 때론 유쾌하고 가벼우며 때론 깊고 진지하다. 그것을 통해 내 사랑을 보여주고, 그이의 사랑을 확인한다. 종종 영혼이 포개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정서적인 교감도 '절정'의 순간이 있다. 그것은 사랑을 확신하게 하고 지속하게 한다. 그 힘이 때로는 삶을 지키는 뜨거운 동력이 되기도 한다.
영혼의 교감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당연히 육체의 교감을 요구한다. '요구한다'라는 말이 어찌보면 부적절한 것이, 동물인 인간은 '낭만적 사랑'을 하기 이전부터 '짝짓기'를 해 왔다. 사랑에서 섹스가 파생된 것이 아니고, 섹스에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영혼이 만나서 절정에 닿는 것만큼이나 육체가 만나서 절정에 닿는 것은 짜릿한 행복이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기 보다 말없이 애인에게 안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 욕구는 논리적이지 않고 직관적이다. 안고, 안기고, 살을 맞대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동물은 그런 것으로 행복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더군다나 인간은 여타 동물들처럼 발정기가 따로 없으며 원치않는 임신을 피할 수 있다. 임신과 양육에 대한 부담 없이 언제나 육체적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진화했다.
스킨십이 전달할 수 있는 우호적인 감정은 남녀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때로는 위로나 격려의 말보다,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깊게 마음을 울린다. 고등학교 이후 나는 아빠와 몸도 마음도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한때 아빠가 나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아빠가 뭐라고 사랑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 출근 전 아빠가 항상 해 주던 뽀뽀, 수염 때문에 까슬하던 볼의 감촉, 가까이 오던 스킨 냄새와 '쪽' 하는 경쾌한 소리. 그런 것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사랑은 때로 말보다 감각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육체의 사랑과 그 즐거움에 대해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인색하다. 영혼의 교감에 비해 육체의 교감은 어쩐지 조금은 저급하고 일차적인 것으로 폄하될 때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섹스는
엄숙하거나 무거운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조심해야 하거나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때로는 소탈하고 가벼운 것이 될 필요도 있으며
무엇보다 즐거워야 할 '사랑' 그 자체다.
'나인송즈'라는 영화에 보면 이십 대의 연인이 나와 아홉 번 섹스를 한다. 그 아홉 번의 섹스 중간중간에 둘이 함께 음악 공연을 보러 간다.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으며 열광하고, 서로의 몸을 마음껏 사랑하고. 이것이 아홉 번 반복된다. 섹스 장면이 외설적이거나 야하다는 느낌보다, 무척 자연스럽고 순수하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오래 전에 봤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다. 이 영화에서 섹스는 아름답고 즐거운 '사랑' 그 자체였다.
이런 주제에 대해 좀더 깊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나를 전면에 드러내고 쓰는 글이라 완벽히 솔직하게 말하기는 사실 부담스럽다. 언젠가 소설로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미 그런 날을 만난 소설가를 브런치에서 우연히 만나, 그 분이 쓴 '하는, 사랑'이라는 소설을 읽게 됐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희수'는 남편과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다. 그녀와 남편은 정서적인 유대도 없지만 육체적인 교감도 없는 섹스리스 부부다. 이런 불화를 꾹꾹 참고 딸 '은성'이를 키우는 데만 집중하며 살던 희수는 우연히 친한 언니 '윤주'와 부부간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윤주는 희수와 반대로 남편과의 사랑이 매우 깊다. 희수 부부보다 결혼한 지 오래된 중견(?)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윤주 부부가 깊은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이 '스킨십'이다. 윤주 부부는 섹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트러블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며 해결해 왔다. 그런 내공을 풀어 '희수'가 자기 남편과의 갈등을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잘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에 해당하는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사우나에서 친한 여자들끼리 하는 솔직한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라 특별히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만화책처럼 책장이 술술 넘어갈 것이다. 보통 이런 얘기는 좀 쎈 언니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편인데, '전혀 쎄지 않은 사려 깊고 지적인 언니'인 윤주라는 인물이 친 언니처럼 해 주는 따뜻한 조언을 듣는 느낌이라는 게 이 소설의 특별한 매력이다.
오르가즘을 몰라 섹스를 기피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 섹스리스로 살아가는 부부들이 또 그렇게나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책임'과 '희생'에 매몰되어야만 하는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런 부부들에게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라며 잊었던 사랑을 깨워주며, 어려운 이야기를 소설로 따뜻하게 풀어낸 작가님의 용기에 감탄했다.
https://brunch.co.kr/@zoo430/95
https://brunch.co.kr/magazine/sss-1
***현주 작가님의 브런치에 가면, 소설의 일부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한국 소설 100위 안에 들어가는(최고일 때는 60위까지 갔었다고 하네요.) 인기 있는 소설입니다. 저도 처음에 작가님의 출간 스토리가 궁금해 들렀다가 재밌어서 단숨에 읽고 책을 주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꼭 방문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소설의 화제는 '섹스'나 '부부'나 '섹스리스'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으로, 몸으로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의 내용에 솔깃할 것이다.
나 또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이 소설에서 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갔고,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그 할 말의 일부가 바로 이 글이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애인의 등에 업혀 불안을 달래고
애인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느끼는
순수한 동물이다.
나는 내가 한 마리 동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영혼의 행복이 육체의 행복에서 그리 먼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