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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pr 10. 2021

사랑 고백 1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면서부터 '습작 일기'라는 이름으로 글쓰기에 대한 감정을 짤막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나에겐 소중한 감정이라 정리되지 않은 순간의 기분을 캡처하듯 그대로 찍어서 서랍에 모아두었다. 비속어와 헛소리(종종 미친 생각이 들 때가 있다.)가 난무하는 일기장을 그대로 보여줄 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 두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왜냐하면 평생 내 옆에 두고픈 사랑을 찾은 것 같은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팬덤 활동만을 하다가, 이제야 그 사랑을 만나 겨우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 사랑을 바로 옆에 두지 못하고 평생을 바라만 보게 될까 두렵지만, 짝사랑도 나에겐 지대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 폼 잡고 싶지는 않다. 역시나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가 보다.





내 (소설)읽기의 역사


대부분의 '작가지망생'은 '독자'에서 시작된다. 나는 어릴 적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하나, 좋아하는 장르가 있었다. 바로 '이야기'. 나는 책 자체보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시작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동화책이었다. 그것들은  '올리버 트위스트'나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인형극이나 '집 없는 아이', '빨간 머리 앤' 같은 만화 영화로 이어졌다. '천사들의 합창' 같은 어린이 드라마는 거의 마니아 수준이라, 꼭 본방 사수를 했다. 우리 삼촌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는데, 명절 마다 삼촌 팔을 베고 누워서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지금 떠올려 보면 주로 전설이나 민담 같은 구전 설화들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래동화' 카세트를 틀어 놓고, 동생이랑 같이  '예쁜 새를 왕으로 뽑는 이야기'(제목이 기억이 안 난다.)의 대사를 따라 하며 놀던 기억도 난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명견 실버'나 '아기 공룡 둘리' 같은 비디오 테잎을 빌려 보는 건 또 어찌나 재밌던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종종 동생과 나를 남포동에 데려갔다. 엄마 나름의 '어린이 문화 교양 코스' 같은 행사였다. 그 코스는 대략 이랬다.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 같은 걸 파는 경양식 집에 가서 외식을 하고, '이솝어패럴'이라는 단골 옷가게에 가서 옷을 산다. 그리고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산책을 하고, '영광도서'나 '문우당서점'에 가서 책을 사 주는 것이다. 서점에 가면 엄마는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고르라고 했다. 나는 '쉬면서 노는 학교'(이 책은 90년 대에 나왔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선구적이고 혁신적이 내용을 담고 있어, 내가 워라밸 신동으로 성장하는 데 한몫했다.)나 '배우지망생 아이들' 같은 창작 동화를 주로 골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소중한 취향은 길을 잃게 된다. 필독 도서라며 독후감을 쓰라는 책들이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세전', '배따라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소설을 읽으며 나는 '뭐 어쩌라는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뭔 소린지 모르겠네.' 같은 생각을 하며 책을 덮어 버리기 일쑤였다.(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싫어하는 건 또 가차 없이 때려치우는 성미 때문에 이후 어른이 될 때까지 나는 '소설'의 매력을 모른 채 살게 된다. 가끔 엄마 책장에 있던 '나는 내게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나 '사라지는 모든 것들' 같은 어른들이 읽는 책을 꺼내 재밌게 읽거나 소지섭이나 조인성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게 전부였다.


국어교육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꽤 노력을 해도 딱히 잘하지 못하는 과목이 수학과 과학이었다면, 국어와 사회(사탐)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하는 과목이었다. (나는 지금도 기호나 만화보다 글자가 빼곡한 책을 보는 것이 좋다.) 사회 쪽 전공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인 진로를 생각하다 보니(사회 선생보다 국어 선생 티오가 많아서) 국어 쪽으로 전공을 정한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대학교에서 전공 수업을 듣기 전까지 '수업'이라는 걸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고 공상에 빠지는 일이 예사였다. 공부는 그냥 책을 보고 혼자 했다. 이런 이상한 습성 때문에 학창 시절 좋은 선생님들의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놓친 것 같아 아쉽다. 그런 나에게, '소설론' 수업은 놀라웠다. 라깡이나 르네지라르 같은 프랑스 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이 매력적인 구조를 갖춘 소설이 되는 방식. 그런 이야기들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때부터 소설을 보기 시작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고 에쿠니가오리의 소설을 모조리 다 읽었다. 우리 나라와 사뭇 다른 일본의 연애 문화, 성 문화는 신선했다. 아직 어려 말랑하던 나를 둘러싸고 있던 '틀'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새의 선물'을 읽고 나는 은희경 작가님의 팬이 됐다. 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어 줄을 긋던 스물 두 살의 내가 생각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이상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겪는 아픔들. 그런 것들은 모두 의미가 있고 아름다웠다. 남루하고 초라한 일상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 묘하게 나를 감동하게 했다. 그렇게 시작된 소설 읽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경숙. 박완서. 조정래. 무라카미하루키. 박경리. 공지영. 톨스토이. 전경린. 양귀자. 알랭드보통. 박민규. 김영하. 카프카. 한강. 김동리. 김동인. (한 권 한 권 모두 적기엔 너무 많고 작가를 통으로 읽거나 특별히 가슴에 남은 작가들을 떠올리니 이러하다.)


처음에 소설을 읽을 땐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었다. 지금은 문장도 문장이지만, '이야기 구조'에 매료된다.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감정이 어떤 구조에 실려 전달되는가. 그리고 독자는 그 구조물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가.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 작가가 만들어 준 구조물 안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내 나름으로 경험하는 일.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산문집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매우 공감했다.) 나는 그것에 중독돼 있는 사람이다. '영혜'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채식주의자' 속에 들어가 그녀의 감정의 일부를 내 것인 양 생생하게 경험했다. 나는 아이를 낳아 본 적도 없지만, '아이를 찾습니다.' 속에 들어가 '윤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상실'의 감정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생의 본질에 닿고 싶어하는 '안나'의 욕망에서, 배신을 거듭하며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사비나'의 열망에서, 나는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던 또 다른 '나'를 보았다. 그렇게 소설은 생활 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진짜 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내 감정을 꺼내어 들여다 보는 것을 계속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나도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통해 내 감정을 설명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가가 되고 싶어진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redangel61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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