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날 내가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창녀처럼 느껴졌다.

by 사비나






몇 년 전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애인이랑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하고 있었다.


'로즈'라는 시골 창녀가 수도에 있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매춘업소에 취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시골에서 하는 매춘이 주먹구구식이었다면 수도는 상당히 프로페셔널했는데, 신입이 오면 그 업소의 오너가 직접 창녀들을 교육시켰다. 그 교육(?)의 주안점은 서비스의 '리얼함'이었다. 그 업소의 vip손님들은 그 나라의 내로라하는 돈 많은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만족시켜서 발을 끊지 못하게 만들려는 오너의 전략이 장난 아니었다. 남창은 없어서 여자들끼리 섹스를 하는 시늉을 하며 연기를 연습하고, 오너가 보기에 만족할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 업소에서 부유한 남자의 애인이라도 되면 그야말로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창녀들은 그 연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미지 출처: ‘왕좌의 게임’




"저 여자, 나 같아."

"로즈?"


애인은 뜬금없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돈 벌려고 억지로 애쓰는 게 나 같잖아."






당시에 나는 일을 좀 많이 하고 있었다. 심한 경우 몇 달간 하루도 온전히 쉬지 못한 때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가진 시간이 100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일을 하는 데 쓰던 시절이었다. 가끔 쉬게 되어도 놀 체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집순이가 되던 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지? 싶을 정도로 신기한 시절이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웃고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싶은 척하고

진심이 아닌데 진심인 척하고

관심이 없는데 관심이 많은 척하고

결국은 돈 때문인데 돈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고


화면에 가득 찬 그 자극적인 장면이 나에겐 좀 다른 '자극'이 되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적성에 꽤 잘 맞고, 적지 않은 보람을 주고, 내 인생을 꾸려 가는데 아주 효율적인 서포트를 해 주고 있기에 아직도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적성에 맞는 보람 있는 일이라 해도 일은 일이다.


무엇보다 좀 놀고 싶었다.






나는 사실 어려서부터 '워라밸 신동'이었다.


유치원도 2년 중 반년은 안 다니고 놀았다.

중학교 때는 학원 안 다니겠다고 워낙에 고집을 부려서 엄마와 학원 선생님께 상전 대접을 받으면서 다녔다. (정말 철도 없고 싸가지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결국 엄마를 이겨서 방과 후엔 무조건 달콤한 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현란한 스토리텔링으로 야자는 얼마나 자주 쨌던가.

대학교 땐 거의 주사파(주 4일만 학교에 가도록 시간표를 짰음)여서 주 3일은 놀았다. 그땐 공부보다 노는 게 우선이라, 너무 나를 귀찮게 하는(과제나 시험이 너무 빡쎈) 교수님 수업은 필수 전공이 아니면 안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이 나빠지면서 이토록 찬란했던 워라밸 천재의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다고 무조건 돈을 열심히 벌어야 돼?

물이 들어온다고 무조건 노를 저어야 되는 거야???


그 날 이후로 나는 좀 달라졌다.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한 몇 년 여행이나 하며 놀고 싶었지만, 그만큼 과감한 사람은 못 돼서 그렇게는 못하고. 대학교 때 주사를 사수하듯 쉬는 날을 사수했다. 시험이 끝나는 시즌에는 시간을 잘 조절해서 여행도 많이 갔다. 하고 싶지 않은 조건이거나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주는 수업은 거절했다.



재밌게 놀려고 일하는 거지, 일하려고 노는 게 아니며

재밌게 놀려고 태어났지, 만날 돈만 벌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내 시간을 채울 수 있게 열심히 쓰고 있다.






나의 자본주의 미소가 지나칠 때, 열정 연기가 선을 넘을 때

어김없이 '로즈'가 연기하는 그 자극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이미지 출처: ‘왕좌의 게임’(표지 이미지 동일)



그리고 민규 오빠의 띵언을 가슴에 새긴다.


올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뭉툭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들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 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5년 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중









keyword
작가의 이전글'좋아요'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