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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03. 2021

어느 날 내가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창녀처럼 느껴졌다.






몇 년 전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애인이랑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하고 있었다.


'로즈'라는 시골 창녀가 수도에 있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매춘업소에 취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시골에서 하는 매춘이 주먹구구식이었다면 수도는 상당히 프로페셔널했는데, 신입이 오면 그 업소의 오너가 직접 창녀들을 교육시켰다. 그 교육(?)의 주안점은 서비스의 '리얼함'이었다. 그 업소의 vip손님들은 그 나라의 내로라하는 돈 많은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만족시켜서 발을 끊지 못하게 만들려는 오너의 전략이 장난 아니었다. 남창은 없어서 여자들끼리 섹스를 하는 시늉을 하며 연기를 연습하고, 오너가 보기에 만족할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 업소에서 부유한 남자의 애인이라도 되면 그야말로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창녀들은 그 연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미지 출처: ‘왕좌의 게임’




"저 여자, 나 같아."

"로즈?"


애인은 뜬금없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돈 벌려고 억지로 애쓰는 게 나 같잖아."






당시에 나는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심한 경우  달간 하루도 온전히 쉬지 못한 때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가진 시간이 100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일을 하는  쓰던 시절이었다. 가끔 쉬게 되어도  체력이 없어서 어쩔  없이 집순이가 되던 .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있었지? 싶을 정도로 신기한 시절이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웃고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싶은 척하고

진심이 아닌데 진심인 척하고

관심이 없는데 관심이 많은 척하고

결국은 돈 때문인데 돈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고


화면에 가득 찬 그 자극적인 장면이 나에겐 좀 다른 '자극'이 되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적성에 꽤 잘 맞고, 적지 않은 보람을 주고, 내 인생을 꾸려 가는데 아주 효율적인 서포트를 해 주고 있기에 아직도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적성에 맞는 보람 있는 일이라 해도 일은 일이다. 


무엇보다 좀 놀고 싶었다.






나는 사실 어려서부터 '워라밸 신동'이었다.


유치원도 2년 중 반년은 안 다니고 놀았다.

중학교 때는 학원 안 다니겠다고 워낙에 고집을 부려서 엄마와 학원 선생님께 상전 대접을 받으면서 다녔다. (정말 철도 없고 싸가지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결국 엄마를 이겨서 방과 후엔 무조건 달콤한 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현란한 스토리텔링으로 야자는 얼마나 자주 쨌던가.

대학교 땐 거의 주사파(주 4일만 학교에 가도록 시간표를 짰음)여서 주 3일은 놀았다. 그땐 공부보다 노는 게 우선이라, 너무 나를 귀찮게 하는(과제나 시험이 너무 빡쎈) 교수님 수업은 필수 전공이 아니면 안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이 나빠지면서 이토록 찬란했던 워라밸 천재의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다고 무조건 돈을 열심히 벌어야 돼?

물이 들어온다고 무조건 노를 저어야 되는 거야???


그 날 이후로 나는 좀 달라졌다.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한 몇 년 여행이나 하며 놀고 싶었지만, 그만큼 과감한 사람은 못 돼서 그렇게는 못하고. 대학교 때 주사를 사수하듯 쉬는 날을 사수했다. 시험이 끝나는 시즌에는 시간을 잘 조절해서 여행도 많이 갔다. 하고 싶지 않은 조건이거나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주는 수업은 거절했다.



재밌게 놀려고 일하는 거지, 일하려고 노는 게 아니며

재밌게 놀려고 태어났지, 만날 돈만 벌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내 시간을 채울 수 있게 열심히 쓰고 있다.






나의 자본주의 미소가 지나칠 때, 열정 연기가 선을 넘을 때

어김없이 '로즈'가 연기하는 그 자극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이미지 출처: ‘왕좌의 게임’(표지 이미지 동일)



그리고 민규 오빠의 띵언을 가슴에 새긴다.


올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뭉툭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들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 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5년 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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