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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빵

지난 주말에는 친정에 다녀왔다. 엄마가 당신의 집을 사서 이사를 하신 후에 첫 방문이었다. 토요일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하는 바람에 바로 식사를 했다. 엄마는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졸리시다며 방에 들어가 먼저 잠에 드셨고, 나는 거실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 곁에 누워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남편과 아들은 이미 미용실에 가서 없고, 엄마는 홀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뱃일을 했다는 한 트로트 가수의 사연을 듣다가, 문득 엄마의 어릴 때 꿈이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는 가정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엄마도 내게 물었다. 너는 꿈이 뭐였냐고. 나는 글 쓰는 거였지. 지금도 안 늦었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이미 늦었다며 뾰족하게 말했다. 말을 하자마자 이내 후회가 되었다. "엄마, 나 사과 좀 깎아줘." 괜히 어리광을 부리며 사과를 아삭아삭 달게 베어 먹고 집 안 곳곳을 살펴보았다. 이제 집 보는 눈이 높아진 내게는 2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아파트의 곳곳이 눈에 차지 않았음에도 "엄마 이제 베란다 있어서 좋겠네."라고 부러 말을 내뱉는 입안이 썼다. 저녁엔 뭘 먹을지 근처 마트에 다녀오자며 집을 나섰다. 이것저것 장을 보고 짐을 실으려면 차로 가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엄마와 함께 걷고 싶었다. 집 근처에 키 큰 소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좋았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내렸던 눈이 어느새 반 이상 녹아내려 길이 질퍽했다. 엄마, 겨울에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서 걸어. 이쪽 길은 질퍽하니까 눈 오면 아파트 안쪽으로 걸어 다녀. 눈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없어도 길이 얼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서 다녀,라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 동네가 참 좋네~ 우리 엄마는 무슨 복으로 나처럼 야무진 딸을 얻었을까~'라고 능청을 떨며 공치사를 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말년운이 좋대.'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추운 겨울에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 앉아 호- 불어먹고 싶어서 사온 호빵을 간식으로 쪄 먹었다. 저녁에는 막내가 보내준 장어와 마트에서 사 온 고기를 구워 먹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엄마표 두부조림 반찬도 당연히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서는 서울까지 갈길이 멀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씻고 화장대 앞에 서서 머리를 말렸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살아온 지난 이야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점점 뜨거워지는 내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음을 엄마의 붉어진 눈시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엄마, 행복하지?

그럼, 행복하지.


엄마, 미안해.

아니야, 고마워.


엄마는 본인 명의의 내 집을 갖고 싶다고 우셨었다. 나는 친한 사람에게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돈을 빌려주는 엄마가 못 미더워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그날은 우리 아빠가 결혼한 딸내미 집에 방문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아빠에게는 사돈처녀, 내 남편의 여동생 결혼식에 늦지 않게 참석하시기 위해 전날 저녁에 미리 올라오신 거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변두리의 빌라촌이었다.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부엌 옆 좁은 공간에 교자상을 펴고 옹기종기 앉아 친정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대학교 근처 한 평 반짜리 고시원도, 취업해서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만 원인 원룸도, 결혼 전 착실하게 돈을 모아 보증금 오천에 월세 십오만 원으로 겨우 구했던 원룸도, 아빠가 오셨던 집보다는 다 깔끔한 동네에 있었다. 골목길에 설치해 둔 CCTV가 무색하게 거리에는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여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르내려야 하는 계단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던 노후된 다세대 빌라. 차 한 대 지나가기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좁고 어두운 동네였던 그 집이 오늘에서야 부끄럽다. 나는 아빠가 가진 것 중 최고의 자랑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는 꼴이 무참하다는 것을 아빠에게 내보였던 것이 오늘에서야 새삼 아픈 것이다. 허름한 빌라에 살았던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전혀 부끄러울 것 없는 내 인생의 일부분이지만, 내가 거쳐온 인생의 집들 중에서 딱 그 집만이 아빠에게 남았으리라는 사실이 못내 아프다.


멀끔한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에 편하게 주차하고, 깔끔한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함께 들어간 집에서는 아기자기함이 묻어났을, 해가 참 잘 들었던 내 첫 신혼집에 아빠를 초대했으면 어땠을까. 아빠, 여기는 서재방이고, 여기는 침실이고, 여기는 창고로 써. 여기는 베란다인데 엄청 넓지? 여기 화분들 다 내가 키운 거야. 등의 말을 늘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결혼하자마자 바로 집에 모셨더라면 아빠의 기억 속에 딸이 사는 집은 좋았을텐데.. 딸이 멀쩡히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나면 혹여나 돈을 달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주저했던 내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온통 후회뿐이지만 아빠, 엄마, 동생들 모두 함께였던 그날의 나는 기분이 좋았다. 스물넷 어린 나이에 취업을 해서 가장 부러웠던 건, 첫 월급으로 가족들과 외식을 했다는 입사동기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내게는 왜 꿈만 같은 이야기여야 하는지 서러워했던 감정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았던 나이였다. 그래서 온 가족이 모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던 것이다. 어쩌다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늘 술에 절어 있었던, 집에 한바탕 난리가 나는 날이면 늘 만취상태였던 우리 아빠였기에, 나는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것을 정말이지 싫어했는데, 그날은 냉장고에 몇 캔 있던 맥주가 동이 나자 술을 사 오겠다고 일어서는 아빠의 곁에 냉큼 따라붙었다. 찬바람이 쓱 지나가면 몸을 잠깐 움츠리게 만드는 늦가을의 어느 밤에, 변변찮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아빠와 함께 걸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빠와 팔짱을 꼈다. 그렇게 둘이서 함께 골목길을 걸었던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아빠, 이렇게 다 모이니까 좋지? 그러니까 술 좀 줄이고,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모으고, 엄마 절대 안 때린다고 약속하면 내가 중간에서 잘 얘기해 볼게, 이제 애들도 곧 결혼할 텐데 부모님이 이혼하셨다고 하면 우리 애들 무시당해..' 등의 철없는 말 따위를 쉬지 않고 내뱉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 가족도 다시 온전한 형태를 갖출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분에 취해. 아빠는 그런 내 곁에서 그저 말없이 걸었다. 늘 빨랐던 아빠의 걸음걸이가 그날은 유독 느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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