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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집

by 단팥빵


내가 어릴 적 자고 나란 동네는 4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없었다. 그 정도로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나는 열 번은 족히 넘게 이사를 다녔다. 포장 이사의 간편함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못했던 시골 마을, 살림살이를 일일이 포장하여 트럭에 싣고 힘겹게 짐을 옮기는 고생은 늘 우리 엄마의 몫이었다.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산다는 건 고단한 일이었고, 그중에서도 옥탑집은 가장 허름했지만, 지금에 와서 떠올려 보면 가장 추억이 많은 집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르내리기에는 비좁았지만 혼자서는 충분했던 가파른 계단. 정돈되지 않는 잡동사니가 가득하고 곳곳에 얼기설기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마지막 층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신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현관문은 따로 없다.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나무문을 열면, 두어 평 남짓하여 거실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공간이 있다. 하지만 손발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두 안경알에 뽀얀 김이 서리면 내 마음도 이내 따스해졌다. 나는 그곳에서 동생들과 게임을 했다. 그 게임기에는 수십 개의 게임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로드러너라는 게임은 너무 어려워서 금방 끝나버렸다. 낮에는 주로 동네 슈퍼에서 육손이 아저씨와 바둑을 두던 우리 아빠였지만, 가끔 집에 계실 때도 있었는데, 로드 러너를 하던 우리를 지켜보던 아빠는 혀를 쯧쯧 차며 조이스틱을 줘보라고 하셨다. 그 당시의 나는 아빠가 이걸 어떻게 하냐는 의심 가득한 마음으로 넘겨드렸는데, 정말이지 압도적인 실력으로 끝판까지 깨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엄마가 내 동생을 배에 품었을 때, 이번엔 분명히 아들일 거라면서 게임기를 사서 몇 달 내내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어린 시절 철없는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일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대단하진 않았지만 삶과 직결된 것이었다.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내기에는 너무 보잘것없었던 얇은 외창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깜깜한 밤. 보일러의 기름이 똑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왜 항상 동네 유일한 기름집이 문을 닫아 부를 수 없는 시간에만 바닥을 드러냈는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넉넉하게 기름을 채워두고 살 수 없었던 형편 때문이었으리라. 근근이 유지하던 옥탑집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한기가 감도는 싸늘한 바닥에, 가진 것 중 가장 두툼한 이불을 여러 겹 깔아주던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때의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푹신한 침대 같다면서 동생들과 이불 안에 쏙 들어가 꼭 붙어서 잠을 청했다. 내게는 즐거웠던 기억이라 잊고 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때 아빠는 우리에게 미안해했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미안하긴 뭘 미안해. 술 마시고 곯아떨어져서 기름 떨어진 줄도 몰랐지. 으휴 웬수."라고 대답하여 나는 웃었다.

나무문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미닫이문 너머는 안방이고, 미닫이문 오른쪽에도 작은방이 하나 있다. 나무문과 미닫이문 사이에 두어 평짜리 공간에는 벽 쪽에 붙여둔 낮고 작은 테이블이 있다. 그게 그 시절 우리 가족의 간이 식탁이다. 좀 더 안쪽에는 작은 부엌이 있다. 그 옆으로 나가면 바닥을 시멘트로 대충 발라둔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는 통돌이 세탁기가 있고, 그 옆에는 지하수가 나오는 수전과 물이 반쯤 받아져 있는 갈색 고무 다라야가 있다. 비닐을 여러 겹 쌓아 어찌어찌 형태를 갖춘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이 나온다. 은색 스티로폼 같은 것으로 감싸놓은 수도 호스를 따라가다 보면 옥상 구석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 앞에는 빨랫줄이 설치되어 있어서 해가 좋은 날에 빨래를 널어 말렸다. 겨울에 부엌 싱크대에 설치된 물이 조로록 얇게 떨어지도록 켜두는 것을 깜박 잊으면, 수도 호스가 밤새 꽁꽁 얼고야 말았다. 그러면 고무 따라야에 얼어있는 얼음을 깨서 쇠 주전자에 넣어 팔팔 끓게 하여 스티로폼 안쪽의 호스가 녹을 수 있도록 일정량의 물을 꼼꼼하게 부어주는 것이 나는 재미있었다. 고양이 우는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고요하고 적막한 어느 서늘한 새벽에, 저 멀리 바람에 스산하게 흩날리고 있을 은행나무숲 위에 걸려있는 달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 옥탑집에서 아빠와 단둘이 살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압력밥솥으로 맛있게 밥을 짓는 법을 아빠에게 배웠다. 물을 잘 맞춰서 가장 강한 불에 올려두었다가 딸랑딸랑 소리가 울리면 불을 3단계로 줄이고, 또 소리가 울리면 2단계로 줄이고, 또 소리가 울리면 1단계로 줄여 뜸을 들이고 나면 맛있는 밥이 완성된다. 아빠는 해가 지고 나면 고기를 잡으러 가시니까, 잘 지어진 쌀밥에 계란 물 입혀 지진 천 원짜리 분홍소시지 반찬을 곁들인 게 내 저녁이었다. 그렇게 혼자 밥을 먹고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때쯤 아빠를 만났는데, 밤사이 폭우가 쏟아져 배가 뒤집혀 죽을뻔했다는 아빠의 말을 들은 날 이후로는,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텔레비전이 파란 화면을 띄울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서야,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온 아빠를 만나고 나면, 그제야 안도하고 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아빠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발걸음을 재촉하여 끼이익 나무문을 열었다. 칼칼한 국물 냄새가 났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낮고 작은 식탁 위에는 검은색 뚝배기가 올려져 잇었다. 그 안에는 뻘건 국물과 고기가 가득했는데, 아빠는 배가 고프지 않냐며 얼른 육개장을 먹으라고 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지만 장난기 가득한 아빠의 표정에 장단을 맞춰주고자 두어 숟가락 먹고 나니, 아빠는 육개장 맛이 어떠냐며 씩 웃었다. 나는 그제야 눈치를 챈 척 볼멘소리로 "이거 육개장 아니지!"라며 아빠를 흘겨보았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열세 살 어린 계집아이가 먹기에는 누린내가 가득했지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개구진 아빠의 표정이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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