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암막커튼 빨기 ,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한 때 유행했던 MBTI에서 I (Introversion, 내향성) 성향을 가진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타인에게 다 드러내지 못한다. 좋으면 좋다, 기쁘면 기쁘다, 맘에 들지 않으면 별로다,라고 솔직하고 털털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항상 부러운 마음이 든다. 어쩜 저렇게 밉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다 털어놓을까. TV에서 솔직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연예인을 보면서 말투를 따라 해 보고 표정도 함께 지어보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의 내향성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쁘고 아프셨던 부모님이어서 10대 시절 내 속마음을 터놓고 자라지 못했다. 형제라고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오빠 한 명, 그 또한 나에게 큰 대화의 창이 되지는 못했다. 남편과 벌써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1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나는 내 마음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나의 진심을 들킬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덮어두었다. 그럼 내가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는 누군가가 있을까? 아마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내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암막 커튼일 것이다. 그일지, 그녀일지 뭐라고 지칭해야 적당할지 잘 모르겠지만 암막씨는 나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 마음의 소리를, 내 표정을, 내 행동을 다 알고 있다.
왜 암막 커튼 앞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건 아마 그가 나를 외부세계로부터 보호한다는 안도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매일 나에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될 권리를 만들어주고, 닭장뷰에 사는 도시인에게 사생활 침입으로부터 은신처가 되어준다.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감추고 싶은 내 모습이 존재할 때 나는 늘 커튼을 친다. 보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 일에도 이상하게 커튼을 쳐야지만 마음이 놓일 때가 있다.
이렇게 늘 상 천장에 매달려 본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사실 내가 가장 홀대하는 존재 중 하나가 커튼이기도 하다. 커튼을 세척하는 일은 애석하게도 내가 우리 집에서 소홀히 하는 살림 중 하나이다. 핑계를 던져보자면 나의 키가 커튼을 척척 달고 뗄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는 점이다. 가장 번거롭게 느끼는 집안일은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내리거나 높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다. 키도 작고 숨쉬기 운동만으로도 힘들다고 살아가는 나에게 의자를 딛고 어딘 가에 집중하는 행위는 위태롭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아니.. 때때로는 이 정도 높이의 의자를 딛고 올라갔으면 팔이 잘 닿을 줄 알았는데 이 마저도 발꿈치를 한껏 높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커튼 세탁을 자주 미룬다. 하지만 오늘은 이놈을 그냥 두면 우리 가족이 천식에 걸릴 것 같아 안간힘을 써서 커튼을 떼어냈다. 나를 지탱하기에 적당한 의자를 찾아 올라선 후 영차 영차 임무를 완성하여 바닥에 앉아 시침핀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한다.
'너를 빨고 나면 내 비밀도 조금은 상쾌해질까?'
어둠에 가려진 커튼 뒤로 내 안에 가장 비밀스러운 마음이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아마 몇 해 전부터 나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돈스러움이 최근 나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함’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감정노동 서비스직에게 고객이 행하는 횡포가 뉴스화되며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친절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진다. 고객센터에 연결하려고 하면 친절함, 누군가의 가족, 등등의 멘트가 조금은 학창 시절 교장선생님 훈화가 생각날 정도로 지겨워질 무렵도 있었다. 나의 엄마는 30년 넘게 보험회사 설계사 생활을 하셨다. 일종의 영업직이고, 사람에게 아플 때 금전적인 혜택을 준다는 명목하게 파는 상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도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실수하는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엄마는 어린 우리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지만, 예민한 나는 엄마의 눈썹 각도와 그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내뿜은 한숨의 크기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저 엄마는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왜 더 아픈 곳을 찾아 찌르지 못해서 안달인지 어린 마음에 항상 의문스러웠다.
이런 환경 때문이었는지 나는 의식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친절을 건네는 경험이 많았다. 할머니가 길을 물으시면 잘 모르는데도 휴대폰 지도를 켜서 찾아드리고, 정말 마음이 놓이지 않을 때는 그 앞까지 같이 가드린 적도 많다. 가끔은 내게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베푸는 이 친절함은 정말 타인을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떠한 친절함을 베풀었을 때 상대가 나를 다정한 사람으로 칭찬해 주면 그 친절함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 같은 이상한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반면 내가 먼저 친절함이라는 명목하에 예쁘게 포장하여 건넨 한마디를 상대가 구겨진 종이조각 취급을 하면 내 안의 친절을 베풀겠다는 본성처럼 여겼던 자아가 사라지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너무나 역설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나를 어디로부터 인가 끌어올리기 위해 베푼 친절이 아니었는데. 왜 나는 타인에게 그러한 마음을 건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걸까. 한동안 이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꺼내어 보면 모두 친절함이 친절함으로 돌아올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우리가 상대에게 보내는 친절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라는 책은 제목만 보아도 친절하기 그지없다. 이기호작가의 센스답다. 당시 이 책을 마주했을 때 ‘친절함’이란 단어의 이중성에 갇혀 있었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운명 같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단편소설을 엮은 이 책에서는 ‘환대’와 ‘친절’이라는 키워드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중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라는 단편은 내가 고민해 오던 결과 맞닿는 내용이라 잔상이 오래 남았다. 소설 속 아파트 입주민들은 아파트 정문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권순찬 씨를 돕기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건넨다. 하지만 권순찬 씨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돈을 모금하기 위해 애썼던 입주민들은 그 돈봉투를 건네며 어떠한 무언가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했지만, 예상 밖의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를 이해한다고, 공감한다고, 위로한다며 건넸지만 고마워하지 않는 그의 반응에 입주민들은 차갑게 등을 돌려버린다.
과연 입주민들이 보내는 친절은 과연 권순찬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파트 주민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까. 내가 커튼 뒤에서 감추던 질문과 같은 것을 던지는 이야기라 반가웠다. 내가 저 아파트의 입주민이었다면, 나는 어느 편에 서서 마음을 보탤 수 있었을까 고민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소설의 독자로서 그 사건을 바라볼 때에 비로소 나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내 안에 들여놓고 읽어볼 수 있다. 현실에서는 내가 선택하던 아니던 어쩔 수 없이 내가 서게 되는 쪽의 입장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문장 속에 갇혀있는 모순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친절도 있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친절도 존재한다. 가족끼리 무슨 친절이란 단어를 쓸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까울수록 더 애써야 한다. 단순히 어릴 때 ‘자식’이라는 그늘아래에서 지낼 때 보다 성인이 되며 조금 더 복잡한 일들이 가족 안에 촘촘하게 엮여가면서 우리는 가장 다정했던 존재들에게 가장 아픈 존재가 되기도 하는 법니다. 암막 커튼을 세탁기에 넣으며 ‘카카오톡’이라는 신문물이 생긴 이후부터 소홀하게 된 안부전화를 부모님께 한통 해야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