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얼마 전 옛 직장동료를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를 20년 전 첫 직장에서 만났다. 그는 그동안 학교도 다녔었고 이직도 몇 번 했었지만 결국은 연어처럼 그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아직도 그곳에는 20년 전 직장동료들이 그대로 다닌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혼을 했고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다 살아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예전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늙어간다고 했다. 복귀하고 처음에는 출근 때마다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언뜻언뜻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게 소름 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한국에 가는 이유였다. 다니던 학교 앞을 지나가고 슈퍼가 있던 상가를 들어가면 뭔가 잃어버렸던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30년 전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건물은 헐리고 거리의 사람들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는 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금방이라도 재건축이 될 것 같은 삼호종합상가, 열심히는 하는데 막상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상점 점원 언니들, 디젤 매연과 하수구 냄새 같은 것들이다.
하긴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중에 30년 전에 존재했던 것들은 눈과 뇌뿐이다. 이들은 일생동안 교체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체 세포의 0.5% 밖에 되지 않는 뇌세포들 덕에 나는 수십 년 전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나는 가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확인을 한다. "그때 우리 야구장 갔을 때가 언제였지" 하고 물어보고 "그거 중학교 2학년 때 엘지 트윈스 홈 게임이었잖아" 하는 대답을 들으면 아, 내 기억이 환각이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아직 그때의 친구들이 있으니 기억을 블록체인 식으로 공유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언젠가 주위에 아무도 물어볼 사람이 없게 되면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냥 꿈이 아니었을까 불안해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기록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이민을 간다는 사실은 더 명확해졌다.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할 요량으로 자동차 정비학원에 등록하셔서 몇 개월 후에 증서도 받았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아버지가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세계의 자동차는 다 모인 북미에 얼마나 날고기는 정비 고수들이 많을 텐데 한국 자동차로 꼴랑 3개월 배우고 그걸로 먹고 살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당시 대기업 다니던 사람들은 다 자기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남들은 날로 먹는 줄 알았다. "안되면 장사나 하지, " "안되면 뭐 기술이나 배우지" 를 입버릇처럼 내뱉던 사람들은 이민 와서 제일 호되게 당하는 부류였다. 당시에도 "한국인은 세상에서 제일 근면하다" 혹은 "한국인의 손기술과 감각은 압도적이다" 식의 근거 없는 국뽕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나서기만 하면 몇십 년 그걸로 먹고산 양놈들 입에서 원더풀 코리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이민자들도 많았다.
우리는 여권사진을 찍었고 대사관이 지정하는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했다. 담당 의사가 형에게 "캐나다로 이민 가는 거 좋아?" 하고 농담을 건네자 형은 그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고 뭔가 알아차린 의사는 형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형은 매번 질문들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었다. 자폐아 특유의 상동행동도 보였다. 잠시 고심하던 의사는 진단서에 급하게 뭘 적어 넣었다. 신체검사서 탈락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사색이 된 얼굴로 집에 돌아왔지만 얼마 후 이민 비자를 받으러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그 의사가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아마 그가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면 우리는 지금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들은 대부분 11시에 시작하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지만 나는 그건 밤에 듣기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좋아하지 않았다. 별밤이 12시에 끝나면 그때부터는 내가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듣는 정혜정 아나운서의 "0시의 데이트"가 시작했다. 정혜정 아나운서는 80년대 말 혜성처럼 등장해서 7시 뉴스, 9시 뉴스, 그리고 여러 교양프로들을 꿰찬 그야말로 아나운서계의 아이유였다. 그 당시 20대 중반의 백지연 아나운서도 이미 9시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는 스타였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인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인재" 들이었다. 그때는 기자나 아나운서 이미지가 지금 같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확실히 덜 천박했다. 아니면 천박한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았던지.
용산에서 3만 5천 원 주고 포장도 없이 산 소니 워크맨 (아마 밀수품이었을 것이다) 은 음질 하나는 끝내주는 것이 헤드폰을 끼고 방송을 들으면 마치 정혜정 아나운서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우울한 하루를 정혜정의 목소리로 마무리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 당시 잘 나가는 아이들은 벌써 폰팅이라는 것을 했지만 그런 재주가 없는 나는 방송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다. 그동안 가슴 설레게 매일밤 대화를 하던 여자를 실제로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엄청난 실망을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인기 많은 여학생이 뭐 하러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다른 학교 남학생과 무작위 전화데이트를 하겠는가? 무릇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다. 하지만 방송만 듣는 나의 망상을 방해할 사건이란 그녀의 결혼소식뿐이었다. 다행히도 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그녀는 당분간 결혼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방송을 들으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과연 정혜정 씨가 날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민 오고 몇 년 후에 친구가 편지로 그녀가 국제변호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 당시 토론토에서 예전보다 더 친구도 없고 돈은 더더욱 없던 나는 지 코가 석자인 주제에 그녀의 조급함을 애석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