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 2023년
S와 나는 30년이 넘게 알고 지낸 사이다. 물론 30년 내내 연락하고 지낸 건 아니고 중간에 몇 년씩 공백기도 여러 번 있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러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아서 반가워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다고 얼굴을 자주 본 것도 아니었다. 90년대에 우리는 손 편지로 대화했고 2000년대에는 싸이월드와 이메일, 2010년대에는 카톡을 사용했다. 그동안 그 흔한 영상통화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니 전화도 한번 한 적이 없다.
이민 이후 S를 다시 직접 대면한 것은 26년 후의 일이었다. S는 만나기로 한 삼겹살 전문점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십 년 만에 얼굴을 보는 순간에 내가 물어본 것은 들어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는 것이었고, S도 그러게 예약을 했는데도 기다리라고 그러네 하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수십 년 만에 보는 S였지만 좀 후덕해진 거 빼고는 생각보다 그렇게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았다. S는 나 보고도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하긴 나는 같은 옷도 십여 년 동안 입고 다니고 지난 몇십 년 동안 계속 엄마가 머리를 깎아주는 처지니 그냥 옛날 그대로 늙기만 했을 것이다.
그 당시 S와 연락이 다시 닿은 것은 오래되지 않았었다. 예전의 B처럼 연락은 살갑게 하다가 막상 만나면 서먹하게 굴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내가 S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항상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S와 이야기할 때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내가 아는 S라면 싫으면 싫다고 말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S는 맛있는 돼지고기를 대접하게 되어 매우 뿌듯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재미있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다음에 올 때면 아마 S를 다시 못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고 그동안 많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2년 뒤 나는 다시 한국을 방문했고 S는 내방역 어딘가의 탕수육이 끝내주는 중국집으로 데려가서 저녁을 사 주었다. S는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졌고 더 젊어 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한국여행은 이것으로 마지막일 거야 라고 생각했고 이듬해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내 예상은 사실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코로나는 결국 사그라들었다. 올해 만났을 때에는 도넛과 양대창과 사이폰 커피와 스파게티와 탕수육을 사 주면서 앞으로도 먹을 게 많이 남았으니 건강하게 잘 살다가 또 만나자고 했다. S는 항상 음식에 진심이었고 그녀의 부피는 4년 전보다 더 줄었지만 맛집은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저번보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연애를 하는 중이던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피를 마셨던지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S는 중학교 2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고, 다른 삼풍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처럼 부유하고 깔끔했다. 그녀는 키가 작아 앞에서 두 번째 자리였고 나는 뒤에서 두 번째였다. S는 피부가 아주 하얬고 객관적으로 봐도 예뻤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기 주변에 앉아 있는 애들과 친했는데, 나는 딱히 그러지는 않았고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아무나 붙잡고 싱거운 소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S와도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특별한 사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S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모범생이어서 항상 1등을 했고 옷매무새도 단정했으며 목소리는 얌전하고 가냘펐지만 뭔가 심야방송 아나운서처럼 어른스러웠다. 나는 S가 나중에 커서 성우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반 남자애들이 S가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반까지 원정온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각 잡힌 옷을 입고 열심히 필기하는 S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말하기로는 S는 자신이 인기 있는 줄은 전혀 몰랐고 살찌고 못생겨서 왕따 당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S는 사실 우리 반의 비공식 왕따였다. 적어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랬다. 공부 머리는 엄청 좋았지만 옛날의 B처럼 눈치가 없었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말투가 아이들의 것이 아니라 책만 읽던 사람처럼 문어체로 종종 말을 했다. 당시 우리 반에서는 팔씨름이 유행이었는데 하루는 S가 남자아이에게 팔씨름을 지고 분한 마음에 '하지만 난 널 공부로 이길 수 있단다' 하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그날은 S의 험담을 하느라 아이들이 바빴다. 남자애가 사실 공부를 많이 못하는 애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S도 자기가 왕따라는 걸 알고 있었고 당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S는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단짝이 한 명 있었다. 그 단짝 여자애는 을지문덕처럼 덩치가 있는 데다가 쌈닭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S의 가드 노릇도 해 주곤 했다. 그리고 그 친구도 뭔가 사회성이 조금 결여되어 있어서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1절에서 그치지 않고 3절까지 하는 아주 진저리 쳐지는 아이였다. 그런데 S는 전혀 그런 걸 개의치 않는 듯했다. S는 사회성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심성은 착했고 배려심이 있었다. 하루는 쌈닭이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나에게 계속 시비를 걸어댔는데 나는 쌈닭보다도 그 뒤에 서 있던 S의 난처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만화에서 여주인공이 난처해하는 것처럼 난처함의 정석을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S는 애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이상한 애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S와 자주 이야기하던 L이라는 남자아이는 곱상하게 생기고 얌전했는데 틈만 나면 나에게 최신 음담패설을 교실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얘기해주곤 했다. L은 나에게 S에 대해서 가끔씩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실수로 부딪혀서 가슴을 만졌는데 불처럼 화를 냈다면서 성깔이 있는 애라고 했다. 몇 년 후 친구의 편지에서 S와 L이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마 그때 L이 실수로 부딪힌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악 시험이 있던 어느 날 시험을 마치고 나와 L 그리고 다른 친구 한 명 이렇게 셋이서 음악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S와 다른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우리 시험도 끝났는데 놀러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S가 남자애들과 놀 줄도 알았어? 나는 우물우물했지만 여자애들이 계속 강권하자 L은 승낙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아마 거절했더라면 S에게 더 좋을 뻔했을 텐데, 아마 여자애들이 그리고 있던 그림은 뭐 가볍게 오락 한판 하고 강남역 구경 좀 하고 어디 롯데리아 같은 데 들어가서 새우버거 하나씩 때리면서 호구조사 하고 뭐 그런 거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L과 나는 전자오락에 미쳐 있었고 우리는 강남역 근처 오락실로 가서 줄곧 오락만 하고 걔네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S는 없는 시간 겨우 냈는데 이게 뭐냐며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S에게 빚진 느낌이 들었고 그 때문에 나는 S에게 한마디 할 거 두 마디를 했고 인사도 자주 했다.
조금 대화가 오가기 시작하자 S는 날 부를 때 가끔씩 성을 빼고 이름만 불렀고 당시 이것은 파격적인 제스처였지만 나는 S가 사회성이 모자라서 또 눈치 없이 저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 아이들은 내가 S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물론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두 달 후에 이민 갈 처지라 별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학기 마지막 날 나는 아이들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해 주었다. 나는 밴쿠버에 도착하면 편지를 쓰겠다고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주소를 받았다. 친한 아이들의 주소를 다 받고 나자 S가 눈에 띄었다. 물어 봤자 S는 십중팔구 '나 공부해야 돼서 편지 같은 거 못 쓴단다'라고 할 것이다. 사실 다른 아이들 주소도 넉넉하게 받았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물어볼까 말까?' 하고 갈등했던 것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앉아있는 S에게 다가가서 쭈삣거리면서 '편지 쓰게 주소 여기 써줄래?' 했던 것도 기억난다. 예상과 다르게 S는 망설이지 않고 싱긋 웃으면서 아주 또박또박한 글씨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 노트는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기억대로 S의 주소는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