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2023
어떤 철학자들은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격체라는 것은 마치 타고 있는 불과 같아서 '아, 저 불은 내가 1997년에 마포구에서 본 불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2023년의 S는 1990년의 S와 동일한 S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나'는 단지 무수히 많은 신경세포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은 환상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신이 곧 개인의 아이덴티티라고 믿어졌다. 그래야 사후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게 된다면 저승에 있는 나는 비록 몸은 없어졌지만 이승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생전의 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Parfit 은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사람을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옮겨주는 순간이동장치가 있다. 사실 이 순간이동장치는 승객을 그 자리에서 깔끔히 없애 버리고 다른 장소에서 그대로 만들어 내는 장치이다. 새로 만들어진 승객은 원래의 승객과 원자 단위까지 동일하기 때문에 인지적 측면에서도 모든 것이 똑같고, 때문에 그는 순간이동을 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Parfit은 그는 원래의 승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장치가 실수로 두 사람을 만들어낸다면 진짜는 누구인가? 그리고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1943년에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 장교가 2020년에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1943년의 나치 장교와 2020년의 독일 노인은 이제는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이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40년 후 타먹기 위해 현재 꼬박꼬박 노인연금을 부어도 그것의 수혜자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40년 후의 어떤 늙은이이다.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돈을 모으지만 다 남 좋은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래서 일 년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옛날의 S는 과연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S는 생각보다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았다. S는 답장에서 그동안 자신을 기억해 주어서 고맙다며 반가워했다. 예전처럼 상냥했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고교 진학 후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춤과 노래에 빠져 열심히 놀려고 노력했으며, 그래서 좋지 않은 말도 많이 듣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나름 다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실컷 논 덕에 지금은 그냥 봐줄 만한 대학에 다닌다고 했지만 그녀는 명문대 약대에 다니고 있었다. 문득 S가 예전에 자기의 장래 희망은 PD 아니면 약사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타짜의 정마담 같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은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건전하게 지내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는 IMF 직후라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S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듯했다. S는 팝송과 영화에 아직까지도 미쳐 있었어서 메탈리카, 마릴린 맨슨, RHCP 같은 밴드 이야기를 자주 했고 홍대에 드럭이란 공연장을 자주 간다면서 노브레인, 크라잉넛, 18cruk 같은 이름도 언급했다. 밴드 멤버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옛날의 소심한 왕따 이미지는 탈피한 것처럼 보였다. 종강 파티에서 사람들이 그녀가 과에서 제일 가슴이 멋진 여자로 뽑혔다고 말해주자 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다고도 했다. 인맥도 넓고 재미있는 곳도 많이 다니고 무엇보다도 공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부러웠다. '나 지금 연애 중이야' 하다가 두어 달 후에는 '그게 흐지부지 됐어'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다. 방학 때는 가족끼리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다며 미국에서 찍은 사진도 보내왔다. 외모는 예전과 비슷했지만 살이 좀 많이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삶을 사는 S가 왜 옛날 중학교 친구가 뜬금없이 보낸 편지에 꼬박 답장을 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무렵 학교 컴퓨터실에서 밤새워 과제를 하다가 새벽에 집에 오기를 반복했었고 연애니 클럽이니 따위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민 온 지 7년이 지났지만 대학에서 쓰는 영어는 아직도 어려웠다. 혹시라도 낙제를 하면 일 년을 더 다녀야 했지만 나에게 그럴 돈은 없었다. 학비는 대부분 정부 융자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생활비 정도만 받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해서 이번에 졸업은 하는 거냐, 취직은 되는 거냐, 돈 보내느라 허리가 휘었다며 죽는소리를 하셨다. 물정 모르고 가난한 집안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팔아대면서 네가 얼마나 팔자가 좋은지 모르냐면서 윽박지르지만 공부 이야기가 나오면 아프리카 어린이들만큼만 공부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셨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당시의 명문대란 들어가기가 어렵지 그다음에는 대충 시간을 보내도 졸업이 당연한 곳이었다.
큰 고기가 되려면 넓은 바다로 가야 한다 그러실 때는 언제고 하던 장사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돼서 자산이라고는 집 한 채 밖에 남지 않자 겁이 난 아버지는 대학을 결정할 시기가 다가오자 멀리 가지 말고 밴쿠버에 남으면 스포츠카를 한대 사주마 하면서 회유를 하셨지만 그것도 지키지 못할 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사에 즉흥적이었고 그러다 안되면 우리가 이 정도라도 사는 게 어디냐는 말을 빼놓지 않고 했다. 나는 중학생 무렵부터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하는 아버지가 한심했고 대학에 일단 들어가면 가족과 더 이상 같이 살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 달에 300불가량으로 자취를 하려면 식료품도 잘 생각해서 사야 했고 겨울에는 난방을 잘 틀어주지 않아서 대신 오븐을 켜놓고 자기도 했다. 점심은 대부분 캠퍼스 내의 푸드트럭에서 2달러를 주고 핫도그와 콜라를 먹었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사치를 부린다고 낡은 턱시도를 입은 늙은 웨이터가 있는 오래된 식당에서 감자 수프와 다진 고기 스테이크를 세금 포함 6 달러에 팁 75센트를 지불하고 혼자 먹었다. 가끔 구석에서 쥐가 달려가는 것이 보이는 곳이었다. 다 굽고 끓인 음식이니 괜찮겠지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가난했다. S에게 보내는 편지지는 항상 연습장을 찢은 종이였고 반면에 S는 매번 새로운 알록달록한 팬시 편지지를 썼다. 한 번은 퍼즐 뒤에 편지를 써 보내서 다시 읽고 싶을 때는 매번 퍼즐을 맞춰야 했다. 그런데 S는 한 번도 편지지 좋은 거 좀 써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는 건 불편하긴 했지만 창피하지는 않았다. 당시 밴쿠버는 부자들이 많이 이민을 왔었고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큰 사업체를 운영해서 돈이 많았던 한 친구는 대놓고 '그래 너네 집처럼 돈이 없는 집도 드물지'라고 은근히 비꼬았지만 나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 집에 돈이 없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금수저란 건 길 가다 주인 없는 돈뭉치를 줍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운이 엄청나게 좋다는 것뿐이지 그렇지 않다고 창피해할 일은 아니었다. 훗날 그 친구는 미국 공대를 나와서 회사를 좀 다니다가 그만두고 법대를 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다가 그 일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스타트업을 한다고 깔짝거린다고 들었다. 집에 돈이 많으면 싫증도 잘 나고 절박한 것도 없을 터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그때는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기가 죽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거 없고 언제나 돈이 최고다. 돈만 주면 인터넷에서 홀딱 벗고 물구나무를 서도 용인되는 세상이다. 언젠가 직장 동료가 나에게 말했었다.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은 정직해서 좋아, 덕담을 할 때 항상 돈 많이 벌라는 소리를 하거든, 백인들처럼 사명감이니 인류의 행복이니 이딴 가식적인 헛소리 하지 않아, 오직 대놓고 돈이야."
지금 일하는 덴 사장이 꼴통이라서 말이야... 오늘도 여자애 허벅질 만졌지 뭐냐... 나 참..., 그래도 되는 거냐? 되고 말고를 떠나, 허벅질 만진다면 시간당 만 원은 줘야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러고 고작, 천 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