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뜬금없이 가족회의를 소집하셨다. 가족회의란 단어는 80년대에 참으로 자주 쓰였다. 당시 가장이 가족들에게 "가족회의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자" 고 하는 말은 "이 애비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찬성하기 바란다"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그때는 다 그랬다.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미국은 너무 까다롭고, 호주나 뉴질랜드는 너무 시골이고, 그래서 미국과 가깝고 이민도 많이 받아주는 캐나다를 생각하고 계셨다. 수속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고, 신체검사도 통과해야 한다. 건설회사에 근무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영국에서 주재원 가족 신분으로 일 년 반을 살다 온 경험이 있었다. 영국의 학교에 들어간 첫날 코가 크고 타원형 콧구멍에서 흰 털이 많이 삐져나온 담임선생은 칠판에 지도를 그리면서 아시아 끝 아주 작은 나라에서 온 학생이라고 날 소개했다. 영국 본토와 한반도의 면적이 비슷하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교과서를 공짜로 줬고, 점심도 공짜였고, 쉬는 시간에는 교사를 붙여서 일대일로 영어 공부도 시켜주는 나라였다. 거기다가 회사에서 집세도 내주고 차도 줬다. 아마 우리 가족이 제일 호화롭게 살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민에 매우 긍정적이었고, 나는 당시에 내 짝을 좋아하긴 했지만 어린 나의 계산으로도 결혼까지 이어지기에는 약간 좀 힘들 거 같았기 때문에 이민이 그렇게 나쁜 선택이라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었다. 실제로는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지만 이민에 찬성했고 아버지는 내가 이민생활이 힘들다 불평을 할 때마다 말하셨다. '네가 좋다고 해서 온 이민이니 알아서 버텨라.' 이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민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난해졌다.
아버지는 회사 일을 포함해서 뭐든지 힘들면 그만두는 버릇이 있었다. 아버지는 영국에서 귀국하고 나서 곧 그 좋은 대기업을 그만두셨고 상사의 소개로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들을 전전하셨다. 일 년은 천안에, 그다음 몇 해는 여수에, 그다음에는 그냥 집에서... 그것도 이제 신물이 난 아버지는 이민을 단행하셨다. 아버지는 타국에서 31년을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돌아가실 걸 알고 계셨을까.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의 노트북에 저장된 글을 보니 아버지는 이제는 언제고 가야 되면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사는 것도 이제 질리셨던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아버지는 예감이라도 한 듯 뒷마당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두루마기를 태웠다.
"이제 내가 죽으면 이걸 누가 보관하겠냐"
뭔가 엄숙했어야 할 순간이었지만 왜 그런거 하나 깔끔하게 못 하고 땅에다 그을음 자죽을 만드냐는 어머니의 핀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았는데, 공항으로 배웅 나갈 때마다 아버지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그럼 갔다 올게" 하고 훌쩍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셨다. 돌아오실 때도 별다른 추임새 없이 "어 나 왔다" 하고 나타나셨다. 가방 안에는 항상 더러운 빨랫감과 우리들 장난감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왠지 출장에서 아직 안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오실 때는 뭘 갖고 오실 것인가.
응급실로 가시기 전 아버지는 병원 가서 의사들한테 약을 제대로 받아 먹으면 나을 거라며 크게 걱정하지 않으셨다. 차에 앉아서 어머니께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한 번도 손을 흔드신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병실에 오래 있게 되면 지루하니까 아이패드랑 핸드폰도 챙겼다. 나는 그날 밤을 응급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샜다. 아버지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시가 다르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해가 뜨자 나는 집으로 일단 돌아갔고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틀 후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아버지를 병원에서 찾았을 때 아버지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한 손에 전화를 들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을 보고 계셨다. 내가 온 것을 보고 아버지는,
"저 움직이는 그림들은 누가 그린 걸까"
의사가 들어와서 올해가 몇 년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1972년"
그 후로 아버지는 현실과 꿈을 왔다갔다 하시면서 자신이 얼마 전까지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있었는데 날씨가 참 좋았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가
"서랍 안에 돈이 있다, 꼭 잊지 말아라. 그리고 내 은행카드로 은행에 들어갈 수가 없구나"
섬망이 왔구나 생각하던 나는
"네 걱정 마세요, 돈도 있고 카드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쉬셔야 낫죠, 아프지 않으세요?"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매우 졸립구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 서랍 안에 있다"
"네, 먹을 것을 좀 가지고 올게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두리번 거리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국수."
그러나 아버지는 곧바로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국수를 드시지 못했다. 그리고 나흘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진 곳에서 현금이 가득 든 봉투를 찾았다. 1960 달러였다. 그동안 드린 용돈이 그대로 모여 있었다. 어머니 말로는 이 돈으로 투자를 할까 옷을 살까 말만 했지 아까워서 막상 쓰진 못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관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어머니는 거기다 40불을 보태서 그대로 넣어 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국수나 자주 해 줄 걸."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호기롭게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에 이민와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다. 이민생활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장사 안 되는 샌드위치 가게를 속아서 인수하고 꾸역꾸역 버티다가 은행에 가게를 뺏겼고 한국인 동업자와 모텔을 운영하다가 동업자에게 배신당해서 원금만 겨우 건지고 쫓겨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돌아가시기 얼마전부터 아버지는 재수생 시절 만난 친구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긴 전화통화를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말로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아버지 친구들에게 부고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에게서는 대답이 전혀 없었고 십몇년 전 마지막으로 본 고교 동창들이 부의금을 모아서 짧은 위로의 말과 함께 보내 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 참석인원도 엄격히 제한되어 장례식장은 한산했고 방부처리를 해놓은 아버지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여름이라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던지 아니면 염하는 사람이 화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지 했을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의 관이 화장장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이민올 때 이런 마지막을 예상했을까 생각했다.
심장이 고장난 아버지는 일흔다섯번째 생신을 겨우 넘기고 다발성 장기부전에 패혈증이 겹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주 전만 해도 팔십 중반까지는 멀쩡하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왜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는지, 왜 항상 다리와 발이 찬지, 왜 의사는 심장약을 자주 바꿔주는지에 대해서 아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맨발로 흙을 밟으면 좋대는데' '인삼을 먹으면 좋대는데'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산다. 좋지 않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하고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