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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Sep 16. 2022

처음과 마지막

1988년

내가 6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뜬금없이 가족회의를 소집하셨다.  가족회의란 단어는 80년대에 참으로 자주 쓰였다.  당시 가장이 가족들에게 "가족회의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자" 고 하는 말은 "이 애비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찬성하기 바란다"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그때는 다 그랬다.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이민을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미국은 너무 까다롭고, 호주나 뉴질랜드는 너무 시골이고, 그래서 미국과 가깝고 이민도 많이 받아주는 캐나다를 생각하고 계셨다. 수속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고, 신체검사도 통과해야 한다.  건설회사에 근무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영국에서 주재원 가족 신분으로 일 년 반을 살다 온 경험이 있었다.  영국의 학교에 들어간 첫날 코가 크고 타원형 콧구멍에서 흰 털이 많이 삐져나온 담임선생은 칠판에 지도를 그리면서 아시아 끝 아주 작은 나라에서 온 학생이라고 날 소개했다.  영국 본토와 한반도의 면적이 비슷하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교과서를 공짜로 줬고, 점심도 공짜였고, 쉬는 시간에는 교사를 붙여서 일대일로 영어 공부도 시켜주는 나라였다.  거기다가 회사에서 집세도 내주고 차도 줬다. 아마 우리 가족이 제일 호화롭게 살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민에 매우 긍정적이었고, 나는 당시에 내 짝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 계산으로는 결혼까지 이어지기에는 약간 좀 힘들 거 같았기 때문에 이민이 그렇게 나쁜 선택이라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었다.  실제로는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지만 이민에 찬성했고 아버지는 내가 이민생활이 힘들다 불평을 할 때마다 말하셨다.  '네가 좋다고 해서 온 이민이니 알아서 버텨라.' 이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민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난해졌다.


아버지는 회사 일에 재미가 없어지면 그만두는 버릇이 있었다.  아버지는 영국에서 귀국하고 나서 곧 그 좋은 대기업을 그만두셨고 상사의 소개로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들을 전전하셨다.  일 년은 천안에, 그다음 몇 해는 여수에, 그다음에는 그냥 집에서... 그것도 이제 신물이 난 아버지는 이민을 단행하셨다. 아버지는 타국에서 31년을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돌아가실 걸 알고 계셨을까.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버지의 노트북에 저장된 글을 보니 아버지는 이제는 언제고 가야 되면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사는 것도 이제 질리셨던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아버지는 예감이라도 한 듯 뒷마당에서 그동안 갖고 있던 할아버지의 두루마기를 태웠다.


"이제 내가 죽으면 이걸 누가 보관하겠냐"


뭔가 엄숙했어야 할 순간이었지만 왜 그것도 깨끗이 못 하고 땅에다 그을음 자죽을 만드냐는 어머니의 핀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았는데, 공항으로 배웅 나갈 때마다 아버지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그럼 갔다 올게" 하고 훌쩍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셨다.  돌아오실 때도 별다른 추임새 없이 "어 나 왔다" 하고 나타나셨다.  가방 안에는 항상 더러운 빨랫감과 우리들 장난감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왠지 출장에서 아직 안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오실 때는 뭘 갖고 오실 것인가.


응급실로 가시기 전 아버지는 병원 가서 의사들한테 약을 제대로 받아 먹으면 나을 거라며 크게 걱정하지 않으셨다. 차에 앉아서 어머니께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한 번도 손을 흔드신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병실에 오래 있게 되면 지루하니까 아이패드랑 핸드폰도 챙겼다.  나는 그날 밤을 응급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샜다.  아버지는 한시가 다르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해가 뜨자 나는 집으로 일단 돌아갔고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틀 후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아버지를 병원에서 찾았을 때 아버지는 한 손에 전화를 들고 멍하니 하얀 천장을 보고 계시다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저 움직이는 그림들은 누가 그린 걸까"


의사가 들어와서 올해가 몇 년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1972년"


그 후로 아버지는 현실과 꿈을 왔다갔다 하시면서 자신이 얼마 전까지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있었는데 날씨가 참 좋았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가


"서랍 안에 돈이 있다, 꼭 잊지 말아라. 그리고 내 은행카드로 은행에 들어갈 수가 없구나"


또 섬망이 왔구나 생각하던 나는


"네 걱정 마세요, 돈도 있고 카드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쉬셔야 낫죠, 아프지 않으세요?"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매우 졸립구나, 잊어버리면 안 된다, 서랍 안에 있다"


"네, 먹을 것을 좀 가지고 올게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두리번 거리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국수."


그리고 아버지는 나흘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진 곳에서 현금이 가득 든 봉투를 찾았다.  1960 달러였다.  그동안 드린 용돈이 그대로 모여 있었다.  어머니 말로는 이 돈으로 투자를 할까 옷을 살까 말만 했지 막상 쓰진 못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관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어머니는 거기다 40불을 보태서 그대로 넣어 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국수나 자주 해 줄 걸." 


장례식 날 내 결혼식 때 입으셨던 정장을 입고 누워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는 이렇게 조사를 읊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아버지를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하여 주신 여러분들께 아버지를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일흔다섯 해 동안 많은 일을 하셨고 적지 않은 고난을 감내하셨지만 항상 주어진 직분에 충성하셨고 사랑 대신에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것은 덧없다는 것을 저희에게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배우시는 것을 즐겼던 아버지께서는 불과 며칠 전 저에게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기도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아버지께서는 항상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일신의 안녕보다 우선하셨습니다.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선물을 주는 것을 즐기셨으며 남의 근심을 굳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제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님 두 분의 임종을 피치 못할 이유로 지키시지 못한 아버지는 이를 평생의 회한으로 삼고 사셨는데, 차마 가족들에게는 또다시 그러한 짐을 지워주기 싫으셨던 것 같습니다.  새벽에 아버지의 심정지 연락을 받고 황망해하던 중 곧이어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담당의사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는데 언제  꺼질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의사들의 예상과는 달리 매우 불규칙한 심장박동에도 불구하고 저희에게 충분히 작별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마지막까지도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셨던 아버지가 임종을 스스로 늦추셔서 저희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서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초를 가꾸어 선물하기를 좋아하셨고 노래 듣는 것을 즐기셨으며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얻으신 진기한 경험들을 이야기하셨던 아버지를 더 이상 보고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약해진 심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서투른 손으로 고장 난 집안을 고치는 광경도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아버지는 지금 고통과 근심 없는 곳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저희를 즐거이 기다리고 계실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장례를 도와주시고, 참석해 주시고, 위로의 말씀을 주신 모든 교우 친지 여러분께 또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지도 무척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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