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990년에는 유독 노스 밴쿠버에 아시아 이민자들, 특히 홍콩 이민자들이 많이 왔었다. 몇 년 후에 있을 홍콩 반환에 대비해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홍콩을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민자들을 위해서 동네 고등학교에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영어 과목) 과목이 개설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영어가 서투른 전학생들은 주로 시간표를 여러 가지의 ESL 수업과 체육, 그리고 그나마 영어를 덜 쓰는 수학으로 채우고, 진도를 잘 따라가면 ESL 담당 선생의 허락 하에 ESL을 사회나 과학 같은 정규과목으로 교체해 주었다. 영어를 못해서 ESL을 몇 년씩 수강하는 아이들은 나중에 섬머 스쿨이라고 여름동안 단기 속성으로 가르치는 곳에서 정규과목 학점을 땄다. 섬머 스쿨에서 학점을 따는 건 일반 학교에 비해 매우 쉬워서 많은 아이들이 일부러 섬머 스쿨에서 학점을 따고 그 점수로 대학 입학원서를 썼는데, 나는 여름방학에도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게 너무 싫어서 섬머 스쿨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이민자로서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 느끼는 감정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학교에 들어서면 우선 뭔가 매우 이질적인 냄새가 난다. 건물의 페인트 냄새, 학교 구내식당에서 풍겨오는 약간은 역한 기름이나 케첩 냄새, 그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치 아기가 우유 먹다가 토한 것 같은 냄새가 학교 구석구석에서 난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것에 흠칫 놀라곤 한다. 게다가 집안에서 쓰는 언어가 밖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다. 이민자들은 매일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언어와 외모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처음 학교에 들어설 때 나는 뭔가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한국 형은 자기는 한국 여자만 여자로 보인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서양 애들은 생긴 게 너무 달라서 짐승 같아, 눈깔도 개 눈깔 색이고 팔에 털도 나있고 냄새도 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국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리 자기가 서양 사회에 적응을 잘했다고 생각해도 집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벽에 한인교회 달력이 붙어 있는 이상 그러한 이질감을 말끔히 떨쳐버리기는 힘들다. 나는 현지 아이들의 밝은색 눈을 바라보면서 쟤네들도 집에 가면 엄마가 손 씻으라고 잔소리를 할까 궁금했다. 왠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학교 복도에는 미국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복도에 락커가 줄줄이 붙어 있었고 한껏 꾸민 백인아이들이 겨드랑이에 바인더나 교과서를 끼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에서는 머리에 무스를 바르기만 해도 정학을 맞았다. 그런데 여기 아이들은 염색에 메이크업에 찢어진 청바지는 기본이었다. 웬 커플들은 대놓고 키스를 하기도 했다. 흡사 빠져나올 수 없는 만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새로 온 전학생이 궁금한 아이들은 와서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말도 못 하는 동양 놈이 또 왔네 하고 비웃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이런 푸대접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했다. 내 경험으로는 이민 와서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디 가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정도 차별은 한국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우리 반에 머리를 빡빡 깎은 전학생이 청송에서 왔었다. 이름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를 타이슨이라고 불렀다.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타이슨의 짧은 머리를 놀렸고 어눌한 사투리도 비웃었다. 타이슨은 열심히 적응하려고 아이들에게 먼저 말도 걸기도 하고 공부를 따라가려고 소풍 갈 때에도 교과서를 싸들고 버스에서 읽었지만 그런 행동은 아이들에게 더 우습게 보였고 타이슨은 얼마가지 않아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소년이 되었다. 타이슨에게 서울의 문화는 나에게 캐나다의 문화만큼이나 생소했던 것이다. 나도 한두 번은 아이들에게 편승해서 타이슨을 놀린 적이 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흔한 학교 인종차별의 클리셰는 덩치 큰 백인 남학생이 비리비리한 동양인 학생을 밀친다던지 발을 건다던지 할 때 미모의 치어리더 백인 여학생들이 그걸 보고 깔깔대면서 웃는다던지 하는 것인데, 뭐 당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하고 나서 아이들을 피해 다니느냐, 아니면 어떤 식으로라도 나중에 복수를 해 주느냐에 따라 향후 얼마나 학교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 아무리 캐나다라도 당시의 고등학교는 다분히 적자생존의 법칙이 남아있는 곳이었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본인이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잘하던지 운동을 잘하던지 방과 후에 나를 놀리는 아이를 따라가서 뒤통수에 돌팔매질을 하고 협박을 하던지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민자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가장 최악의 방법은 여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부모님의 조언을 듣는 것이다. 그보다는 못하는 영어라도 선생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런 아이들을 지나 ESL 교실로 들어가면 여기는 또 다른 세상이다. 중동 애 둘, 중국 애 넷, 백인 같이 생겼는데 영어를 못하는 동유럽에서 온 애 하나, 서울 들어보지도 못한 동네서 왔다는 애 하나... 뭐 이런 식이었다. 그 반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유창한 사람은 선생뿐이었고 우리는 열다섯 살씩이나 되어가지고 "매리는 어제 백화점에 가서 학용품을 샀어요" 같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내가 영어만 잘했어도 저 교실 밖의 백인 놈들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깨달았다. 언어구사 능력은 나의 생각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말이나 글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고차원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에는 캐나다 인의 기준으로는 모두 바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