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학문적으로 볼 때 인간의 정의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런 걸 꼼꼼히 체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중에는 그 조건에 미달하면서도 슬그머니 인간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인공지능과 인지과학을 전공했다. 무슨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수강과목 설명서를 뒤적이다가 이름이 그럴싸해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 당시는 인공지능의 암흑기였고,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은 절대로 사람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다 하더라도 컴퓨터에게는 '의도'나 '감정'이 없기 때문에 이는 그냥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들은 그런 엄격한 지능의 기준을 생물학적 인간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 의도나 감정이란 걸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적 장애인이나 식물인간도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어떤 지능체가 인간의 수준이냐 아니냐를 굳이 가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계들이 우리와 말이 통한다면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일까?
인지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 대부분은 훈련된 습관이나 감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인에 대해 그때그때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기보다는 습관대로 하거나 떠오르는 감정에 맡긴다. 왜냐면 그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에는 호랑이가 나타나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무작정 도망가는 사람이 생존율이 더 높았다.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어떤 사안을 마주치면 과거의 연관된 기억을 찾아내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 등으로 행동을 유도한다. 더 교묘한 것은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고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처럼 기억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잘 훈련된 기계에 불과하다. 아주 가끔, 열에 한번 정도 무언가를 곰곰이 따져볼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하지 않고 그냥 휩쓸려 사는 사람들도 많다.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내가 이민을 왔던 90년대에도 한국인들은 여기서 더 이상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해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비교당할 일이 적고, 걱정해 주는 척 훈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경조사에 불려 다닐 일도 없다. 한국은 언제나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였고, 그 반대급부로 남에게 훈수 둘 거리가 생기면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터넷 포털 뉴스 댓글창만 봐도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 천지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앞에 두고 뻔한 소리를 여러 번 해대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 꿈을 크게 가져라, 일인자가 되어라... 그런 건 한 번만 말하면 충분하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월요일 아침에는 항상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다. 아무도 교장이 뭐라고 떠드는지 듣지 않았지만 교장은 어디서 주워온 명언 같은걸 적당히 버무려서 항상 구태의연한 소리를 했다. 한국은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들 천지다. 그나마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어디서 들은 대로 아무 소리나 주워섬기는 놈들이 태반이다. 더 아쉬운 것은 그런 말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조언도 없고 오롯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 오면 사람들은 매우 불안해한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부모, 친척, 친구, 동료들의 훈수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제 혼자 네가 알아서 해라 하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남의 말에 쉽사리 흔들린다. 학군이 여기가 좋다던데 하면 그리로 이사를 가고, 요새 뭐가 장사가 잘 된다던데 하면 잘 되는 집 옆에 똑같은 업종을 연다. 캐나다까지 와서도 명문대 입학을 보장한다는 고액의 보습학원을 보내고 다른 집 애가 의대를 들어갔다 하면 부러워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인터넷 게시판에 '40대가 이런 옷 입어도 괜찮을까요' '회사서 잘렸는데 이제 뭘 해야 될까요' 같은 글이 올라올 때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조언을 해주는 것을 본다. 마치 수많은 꼭두각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로 서로를 조종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연상하게 한다.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의 훈수마저 소중한 것이다.
한국에서 중산층으로 살다 캐나다에 와서 서서히 망해가는 이민자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우선 한국에서 그렇게 꿈꿨던 정원이 있는 주택을 산다. 그리고 외국에 나왔으니 자신의 높은 취향에 걸맞는 멋있는 차도 한대 산다. 캐나다 하면 자연 아니겠는가. 가족들 데리고 캠핑도 다니고 한국처럼 저녁이 없는 삶은 살고 싶지 않으니 우선 이민 와서 몇 달은 좀 쉰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으로 뭘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장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수록 장사를 만만하게 생각했다. 장사 초보라면 사실 한국에서 일 년이라도 남 밑에서 장사 경험을 쌓고 오는 것이 맞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녔던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고, 여자보다는 남자가 체면에 더 매달렸다. 다들 이민 올 때는 호기롭게 "트럭운전해서 먹고살더라도 이런 나라에 살면 아쉬울게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 겨울이 춥네 양놈들이 정이 없네 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곳 물정도 모를 때 집이랑 차를 사는데 큰 돈을 다 써버리고 남은 돈으로 생업을 시작하는 일이 흔했다. 그것도 충분히 사전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물어보고 결정했다. 이상하게도 집이나 차를 살 때는 자신의 확고한 취향대로 돈을 쓰지만 장사를 시작할 때는 뭘 하면 좋을지 남의 말만 들었다. 사실 뭘 해도 상관없고 돈이 잘 벌리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적성과는 상관없이 직업 전망에 따라 대학 전공을 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금 이민오는 사람들은 인터넷 덕인지 한국에서 미리 충분히 알아보고 오는 경우가 많다. 직장을 잡아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이민자들도 많아졌다. 옛날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현명해졌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정비학원까지 다니고 왔지만 여기 차를 고칠 자신이 없었던 아버지는 정비소는 가볍게 포기했고, 식료품점이나 편의점은 일요일도 없이 매일 나가야 한다는 말에 포기했고, 그나마 사람들이 추천한 업종 중에서 제일 만만한 샌드위치 가게를 시작하기로 했다. 요리실력이 딱히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고 자리만 좋으면 일하는 사람들 와서 점심만 사가도 먹고살 수는 있을거 같았으니까. 독일계 가게 주인이 팔기 전에 한 달 정도 트레이닝을 시켜주었는데, 아버지는 몇 번 배우더니 별거 아니네, 서양놈들 이렇게 맛없는 걸 먹고 어떻게 살지 하면서 자신만만했지만 나는 그게 우리가 맛없게 만들어서 그런 거라는 걸 몇 년 후에 대학 다니면서 우연히 샌드위치를 사 먹어 보고 깨달았다. 캐나다 사람한테 김치 만드는 법을 한 달 정도 가르치면 나올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음식이었다. 부모님은 새벽 일찍 가게로 출근했고 저녁쯤에 들어오셨다. 설상가상으로 조리 시설도 없는 샌드위치 가게였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은 집에서 밑조리를 하고 전기 프라이팬을 가져가서 데워서 내놓곤 했다. 당시에는 프라이스 클럽이라고 불렸던 코스트코에 주말이면 온 가족이 가서 내다 팔 탄산음료와 머핀, 식자재 같은 것을 사다가 가게에 들러 식당 청소니 재료 준비등을 하고 캔 위에 먼지를 티슈로 하나하나 다 닦았다. 캔이 더러우면 사람들이 마시는 걸 꺼려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한국스런 배려였지만 여기 사람들은 사실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뭐 더러운 거 하나 입에 들어가면 죽을까 봐 호들갑을 떠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여기 사람들은 그런 건 굉장히 둔감했다. 대신에 음식 맛에는 상당히 예민했고 그래서 우리 가게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의 한국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무엇이 문제점인가? 나에게 모자란 점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고 한번 생각해 볼만도 하지만 그때의 어른들은 그냥 뭐든지 열심히만 하고 몸이 힘들면 저절로 뭔가가 나아지는 줄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우울한 일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남들도 요새 다 힘들대..."란 말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남은 돈을 다 가게 사는데 써버린 아버지는 팔고 다른 걸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어머니는 그럴수록 마트에서 가장 싼 것만 샀다. 당시에는 기름이 리터당 40센트 하던 시절이었는데 어쩌다 기름값이 1-2센트 싼 주유소가 보이면 10분을 줄을 서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서 넣고 왔다. 아껴봤자 1불도 안 되는 액수였지만 10분의 시간보다는 1불이 더 아쉽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인지 우리는 점점 가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