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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Dec 27. 2023

주택은 돈이 많이 든다

1990년

어느 정도 캐나다 생활에 익숙해지자 부모님은 세 들어서 살던 타운하우스에서 나와서 집을 사려고 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 전세가 없는 캐나다에서는 매달 내는 월세는 그냥 돈을 길에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집이 있어야지 왜 남의 집에서 생돈을 주고 살아?라는 게 우리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캐나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행에서 모기지도 못 받는 우리 처지에 가진 돈을 거의 다 털어서 집을 산다면 수중에는 돈이 얼마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월세는 돈 버리는 짓이다.  

    집은 사놓으면 무조건 오른다.  

    빚은 없을수록 좋다  

라는 세 가지 주장의 진위 여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빚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택융자 없이 가진 돈을 죄다 집 사는데 쏟아부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새로 온 이민자들은 일이 년 정도 월세를 살면서 캐나다 물정을 더 배우고 난 뒤에 집을 구매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민온 사람들은 급하게 집을 산다. 세입자로 살면 서러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과 달라서 세 들어 산다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심지어 세입자가 빈대를 집에 묻혀 들어오면 집주인 돈으로 방역을 해주어야 한다. 여기는 그런 나라다.


그때는 인터넷이란 게 없었기 때문에 매주 무료로 배포하는 부동산 잡지를 매주 가져와서 그럴싸한 광고에 동그라미를 치고 주말마다 찾아가 보았다. 캐나다는 오픈 하우스라고 주말에 시간을 정해서 아무나 들어와서 집을 구경하는 제도가 있다. 부동산 채널이라고 24시간 주택 매물들 사진을 보여주는 유선방송 채널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나온 집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안 팔려서 나오는 것들이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살던 동네 근처에서 방 3개 이상에 남향이고 정원이 넓은 집을 찾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그럴싸한 집을 골랐다. 이제는 흥정을 해야 될 차례였다. 캐나다는 집과 차 빼고는 모두 정찰제라는 말이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집이랑 차는 수완에 따라 바가지를 쓸 수도 있고 많이 깎을 수도 있다. 깎는 걸 잘 못하던 아버지는 웬만큼 이야기가 오고 가자 계약을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으나 어머니는 그 정도는 안될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의 액수를 불렀고 상대방은 돈이 급했던지 제안을 수락했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3개월이 조금 지나서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었다.


집은 푸른색과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일층집이었고, 경사진 땅에 지어진 집이라 지하에는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었다. 집은 1960년대쯤에 지어졌었는데. 인테리어를 한 번도 안 한 듯 오븐이나 가스레인지도 30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마루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화장실은 복도에 하나, 안방에 하나였다.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많이 낡아 있었으나 마루는 넓고 해가 많이 들어왔으며 천정도 높아 운치는 있는 그런 일반적인 밴쿠버 스타일의 집이었다. 보통 집을 사서 입주하면 업자를 불러서 여기저기 고치고 새 주방기기도 들여놓고 페인트도 새로 칠하기 마련인데, 집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린 우리는 그럴 돈은 없었다. 


캐나다로 이민 가면 새 전축도 사고 가구도 새로 사자고 큰소리를 치셨지만 아버지의 장담이 늘 그렇듯 그중에 이루어진 건 별로 없었다. 이민오기 전 진로도매센터에서 15만 원 주고 산 싸구려 전축을 마루에 놓았고, 그 옆에는 우리가 영국에서 산 오래된 TV와 VCR을 놓았다. TV와 전축 맞은편에는 주말마다 찾아가는 가라지 세일에서 50불을 주고 산 소파를 놓았다. 우리는 미니밴이 있었기 때문에 덩치가 큰 가구도 아무 때나 실어올 수 있었다. 침대 이외의 가구들은 대부분 남이 쓰다 내놓은 걸 얼씨구나 하고 주워온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멀쩡한 걸 내놓는데 안 가져오고 배기냐 하며 집이 스타일이 아주 좋아졌다고 수선을 떨었다.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냥 막연히 아버지가 저런 중고가 취향인가 생각했다.


흔히 아끼면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끼고 절약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면 세계관도 그만큼 작아지고 구차해진다. 옷을 안 사는 사람이 스타일이 좋을 리가 없고 국밥만 사 먹는 가성비 마니아가 식도락을 알 리가 없다. 미국은 그렇게 돈을 써대지만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다. 옛날 전래동화 중에 쌀 다섯 되로 한 달을 지내야 며느리로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건 부자의 이야기가 있다. 수많은 처녀들이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어서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굶어 죽기 직전에 들것에 실려 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떤 젊은 여자가 지원을 했다. 처녀는 집에 들어오자 방 청소부터 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밥을 지어 배불리 먹고 남은 쌀로 떡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얼마의 이득을 본 처녀는 다시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매일 떡을 만들어 팔았다. 처녀는 솜씨가 좋았기에 떡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한 달이 지나자 처녀는 곳간에 쌀 두어 가마니를 쟁여 둘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인재들이고, 우리는 적은 쌀을 나누어 죽을 쑤고 바닥에 누워 시간 가기를 기다리는 나머지 지원자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도 대부분의 소시민답게 아끼려고만 했지 그만큼 돈을 더 벌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은 진작에 거세되어 있었다. 게다가 옛날에는 가난하면서 고고한, 청빈이라는 개념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학식이 높은 사람이면 재물을 좇는 것이 추하다고 여겨졌다.  옛날 사람들은 무능을 그렇게 포장했다.  


아파트에만 살아본 우리는 주택이란 사람처럼 매일 조금씩 죽어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돈을 들여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엌에서는 물이 샜고 마당에는 잔디보다 민들레와 이끼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년 잔디에 흙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잔디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겨울에 수도 파이프가 얼어 터져 벽 사이로 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고장이 났고 아버지는 그때마다 별거 아니라면서 본인이 직접 고쳤다. 아버지는 중고 공구들을 여기저기서 사 모았고 '집 고치는 법'이란 책을 한 권 구해와서 대충 훏어보면서 자기 생각대로 고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기술을 배우지 못하고 어디서 대충 본 실력으로 고쳤기 때문에 수리는 오래가지 못했고 미관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벽은 울퉁불퉁해졌고 페인트 자국이 여기저기 남았으며 수도관은 어딘가가 항상 조금씩 샜다. 꼼꼼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집수리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치려면 좀 똑바로 하지 저게 보기 싫게 뭐냐고 역정을 냈고 아버지는 그럼 당신이 고치던가! 하면서 싸웠다. 우리 집은 자주 수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만큼 자주 싸우기 시작했다


영어가 서툴렀고 푼돈을 아꼈으며 물정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수리공을 부르면 항상 바가지를 쓸 거라고 확신했다. 그건 아마 사실일 것이었다. 아버지는 호인답게 남에게 뭘 잘 따지지 못했고 게다가 자신의 짧은 영어 실력의 한계를 내보이는 것도 싫어하셨다. 옆에서 어머니가 안 되는 영어로 대신 뭘 꼬치꼬치 캐물으면 당신은 좀 가만히 있으라고 신경질을 냈다. 사기꾼에게 그보다 더 좋은 고객은 없다.


그런 생각은 말년에도 여전했다. 돌아가시던 해 아버지는 새해 벽두부터 중앙난방장치에 가습기를 달아야겠다면서 나에게 인터넷에서 뭘 찾아봐야 하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이백달러 정도만 주면 사람이 와서 다 설치해 줄 거예요 했지만 아버지는 미쳤냐 백 달러짜리 가습기를 이백달러를 주고 설치하게? 하고 본인이 다 할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아버지는 환풍통로에 구멍을 뚫으려고 절대로 절단에 쓰면 안 되는 앵글 그라인더를 철판에 갖다 댔고, 반등하는 힘에 그라인더를 놓친 아버지는 톱날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박살이 났다. 나는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 한 시간을 운전해서 부모님 집으로 갔다. 집안에 피가 여기저기 흘려져 있었다. 그날 오후 응급실 의사는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손가락은 살릴 수 없으니 절단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대신 전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그러자고 했고 얼마 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놈들이 손가락을 흔적도 없이 잘라버렸다고 울먹이셨다. 우리는 아버지를 데리러 병원에 갔고 추운 날씨에 다 낡은 외투를 걸친 아버지가 응급실 입구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왼손으로 수저를 드셨다. 형은 아버지에게 손가락이 몇 개냐고 계속 물었고 아버지는 힘없이 아홉 개라고 말했다. 간호사인 아내는 절단된 손가락은 한 일 센티 정도 더 자랄 것이고 그다음에 가짜 손가락을 붙이면 된다며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어머니도 뭐 그런 사고도 날 수 있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아버지는 손가락을 잃은 후로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항상 누군가가 자기 손을 볼까 걱정을 했다. 매일 전화하는 고모들과 친구들에게도 사고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습기는 잊어버리시고 나중에 사람 불러서 설치하자는 말에 거의 다 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마무리 짓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상처가 대충 아물고 나서 며칠 동안 지하에서 뚝딱거리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가습기 설치를 마쳤다고 했고 우리는 알겠어요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버지의 건강은 더 빨리 나빠졌고 4개월이 지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 나는 보일러의 공기필터를 교환하려고 내려간 김에 가습기를 살펴보았다. 건조한 겨울이었고 전원도 연결되어 있었지만 가습기는 한 번도 작동된 적이 없는 듯 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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